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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223]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23]

En Hakkore 2024. 7. 28. 16:35

은혜를 구하는 일 1(마 7:7, 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절).

앞 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주체를 경고의 형식으로 언급하셨으나, 여기에서는 혈과 육과는 아주 상반되는 이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 은혜를 얻기 위한 약속된 통로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기도의 의무와 관련된 교훈을 주셨으나, 여기에서는 의무를 실행할 수 있는 귀중한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능력과 도움을 많이 얻고자 한다면, 다른 모든 합법적인 수단이 작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뜻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이 구절보다 더 심하게 곡해되어온 성경 구절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일종의 백지 수표라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그의 영혼의 상태나 그의 생활태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써 넣을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기로 약속하신 일종의 백지 수표라고 생각해 왔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곡해가 그렇게 널리 퍼져 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논증해 보아야 한다.

야고보서 4:3에서도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너희가 잘못 구함이니라" 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먼저 이 세상을 구하고, 다음으로 다가올 세상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즉, 자기의 죄를 버리지 않고 자비를 구하는 자들이거나(잠 28:9), 자기가 스스로 고안한 방법, 다시 말하면 거룩한 복음의 방법이 아니라 육체를 즐겁게 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구하는 자들이거나, 혹은 약속된 중보자를 무시하고 자기의 이름으로 오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구하는 자나 자기의 구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마음으로 깊이 깨닫지 않고서 형식적으로 위선적으로 구하는 자는 "잘못 구하였으므로"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앞의 구절에 권고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며, 그리고 그가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거나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일을 삼가야 함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는 말씀은 결코 누구나 모두에게 주는 백지 위임장은 아니다.

여기에서 살펴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공급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며, 더욱이 만일 그러한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올바르게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잘못' 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은 자는 이와 같이 올바르게 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믿음으로 구할 능력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나 기질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죄를 전적으로 반대하는 거룩한 원리이며, 자연인은 죄 가운데 너무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가 죄를 반박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갈망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시나무가 포도를 맺을 수 없듯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그를 따르기를 갈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를 올바르게 구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올바른 욕구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습관적인 기질로 말미암아 모든 영적인 열망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바라는 것에 대하여 참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혼으로는 그것을 반대하는 일은 명백한 모순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때때로 갖고 있고, 자신에게조차 그들이 진심으로 은혜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려 하는 몇몇 속물들의 예외적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쉬운 일이다. 즉 그들이 참된 은혜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거룩한 원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의 생각속에서 은혜의 거짓 현상을 그렸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들이 죄를 가볍게 생각하여 육체의 정욕에 빠지는 것을 인정하는 이 거짓 '은혜'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 거짓 은혜가 완전히 그들의 부패한 본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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