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산상수훈 220]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20]

En Hakkore 2024. 7. 28. 16:33

부당한 관용 (마 7:6)

청중들 각자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청중들 각자가 자기에게 합당한 몫을 구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야" 한다(딤후 2:15).

설교자들이 위선자들을 밝혀내려고 할 때에 그리스도의 어린 자녀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목사들이 절망하고 있는 성도를 위로하려 할 때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 거짓된 평화를 누리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목사가 지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어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 (겔 13:22)는 엄중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7:6은 가장 헛된 고백을 하는 자들이 교회의 동료로 받아들여질 때 슬프게도 무시된다. 즉 '자비로운 판단' 이라고 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둠을 빛이라 부르도록 요구하지는 않는다.

모호하게 판단하는 것은 비판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약하다. 주님의 식탁(성찬)에 공공연한 속인들로 앉도록 허락하는 것은 이 본문의 말씀을 지독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또한 '장례식이나 장례식의 설교'에서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자주 무시되고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이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어떤 집단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면 곧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영혼을 구하는 자'가 되도록 의무적으로 노력하라고 요구하며, 만일 그러한 '개인적인 일'과 복음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의 영원한 행복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 중에서 아직 어린 회심자에게 그런 명령을 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그 제한은 우리 마음의 지극히 신성한 체험을 아무에게나 나타내지 말라는 경고이다. 왜냐하면 중생하지 않은 자가 성령의 주권적 사역을 알 만한 능력이 없으며, 그것은 마치 돼지가 진주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 어린 회심자는 '그리스도의 증인' 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어떻게 증거해야 하는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즉 변화된 생활, 비세속적인 행동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증거' 이다(마 5:16).♡

열심은 지식에 의해 알맞게 조절되어야 한다. 복음의 거룩한 일들을 무분별하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그의 사랑의 귀중한 비밀은 그의 적들에게는 전달될 수가 없다.

믿는 자들이 이 엄숙한 한계를 무시한다면, 믿음의 신비를 알게 해 줄려는 시도를 받은 자들이 모욕하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해도 놀라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냥 두어라"(마 15:14)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그릇된 방식들로부터 그들을 회심시키려고 참으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잠 14:7), 그와 함께 논쟁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위엄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명령받았다. 우리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명령받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회답할 때(잠 22:21)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할 것이며(벧전 3:15), 허풍을 떨거나 주제넘게 대답해서는 안된다. 신약의 서신들은 "거룩한 형제"에 의해 읽혀져야 하며(살전 5:27), 속인들에게 읽어 주어야 한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89

'강해시리즈 > 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상수훈 222]  (0) 2024.07.28
[산상수훈 221]  (0) 2024.07.28
[산상수훈 219]  (0) 2024.07.28
[산상수훈 218]  (0) 2024.07.28
[산상수훈 217]  (0) 202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