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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16]

En Hakkore 2024. 7. 28. 16:30

잘못을 범한 형제를 돕는 일 (마 7:5)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와 가까워야만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서 우리가 누구의  잘못을 고쳐줌으로써 그들의 도움이 되고자 해야 마땅한가를 암시해 주고 계시는데, 즉 그들은 생소한 사람이 아닌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며, 우리의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이고, 교회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분명하고도 간단한 규칙을 무시함으로써 참으로 많은 해를 받아왔다. 나의 책임은 먼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 다음으로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존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들에게 소중한 사람들과 신실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티를 제거해 주려고 했던 그 사람과 가깝게 지내야만 한다는 것은 그의 사랑과 존경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음도 그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위장된 자기 우월성을 거만하게 추켜올리는 사람과는 친밀하게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일이야말로 더 많은 기도와, 감정의 민감함과, 영적 지혜의 온유함이 가장 필요하다. 요구되는 동기는 바로 사랑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한 목적과 잘못한 것을 회복시키려는 것이 그 목표이다. 눈은 육체에서 가장 민감한 기관이며 가장 쉽게 해를 받는 부분이다. 그래서 침착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그 눈에서 이물질을 빼어 내는 일이 요구된다.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접근할 때에는 효과적으로 견책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가장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야 한다.

아비가일은 다윗에 대한 자기 남편의 야비한 행동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자기 남편이 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삼상 25:36, 37). 즉 그가 격렬하게 분노하여 있을 때에는 절대로 그의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때에 알맞는 말"을 하게 된다면, 잘못을 범한 사람의 그 잘못의 본질이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생긴 것인가 또는 고의적이고 위압적인 어떤 죄인가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로 하여금 그에게 죄가 있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행동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수고해야 하는데, 이는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딤후 4:2) 경책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오직 '신령한' 사람만이, 곧 자기 자신 속에 죄를 허락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조용하게 동행하는 자만이 이 필수적이고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동료 신자에게 접근하는 데에 합당한 자이다.♡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서로 결합하였으므로 한 사람의 나쁜 행동은 모든 구성원들과 관계가 있으며, 잘못을 범한 사람의 회복을 추구하는 것은 믿음의 전 권속들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한 회복은 오직 '온유한 심령으로,' 즉 마음의 관대함과 겸손함으로써만 성취될 수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극악함과 교만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죄를 범했든지 간에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도 같은 죄를 범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이것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은 "경우에 합당한 말" 이어야만 한다(잠 25:11).

끝으로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제거해 주고자 한다면, 그 사람도 자진해서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 즉 온갖 저항하는 마음은 그 일을 시행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분명하게 사용하신 그 상징은 우리들 각자가 형제의 잘못을 고치는 데에 거리낌 없이 스스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의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출 2:14) 라고 비난하였을 때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신실한 훈계를 항의한다면, 그것은 매우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며 영혼의 슬픈 상태를 나타내는 일이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 13:18).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 7:5).

즉 우매자의 노래가 우리의 귀에 더욱 달콤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지혜자의 책망은 우리가 그것을 유념해 두기만 한다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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