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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148]

En Hakkore 2024. 7. 22. 21:20

성한 눈2(마 6:22,23)

이제 거듭남에 있어, 영혼의 눈은 새로워지고 그 시각은 바로잡아진다. 신앙의 눈이 열리며 식별력이 하나님의 빛으로 밝아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열중하는 전 대상이 되며 그의 영광이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결과적으로 온 영혼이 이제 "밝을 것이요," 영혼의 모든 능력은 그 유익한 영향력 아래 놓여지게 된다. 양심이 불어넣어지며 감성이 따뜻해지고 의지는 올바른 지시 아래 행동으로 옮겨진다.

밝아진 식별력과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양심이 이제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선과 악의 차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소리와 모든 거짓 목자의 소리를 분별하며, 참된 행복의 근원과 물을 저장치 못할 터진 웅덩이의 차이를 식별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의 영적 판단(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가르치고 교육받은)에 의해 매사를, 즉 무엇을 행해야 되고 무엇은 행하지 않아도 되는지 결정하고 판단한다. 하늘의 지혜를 부여받아 그는 참된 행복과 말로 다할 수 없는기쁨의 비밀을 배운다.♡

그러나 믿는 자의 '눈'이 실제적인 과정에 있어 '성한' 상태를 유지할 때에 한해서만 그의 온 몸(영혼)이 '밝을 것'임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육체의 눈, 시각기관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비춰져야만 하는 것처럼, 새로워진 식별력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끊임없이 교화를 받아야 된다.

육체의 눈이 빛을 받는 용기처럼 그 광선에 의해 몸을 비추어 주듯이, 식별력과 양심도 매체이며 이를 통하여 영적인 가르침이 영혼에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눈이 더 이상 빛 가운데 있지 않게 되는 즉시 몸은 어두운 중에 더듬어 나아가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귐이 깨어지자마자 영혼은 전혀 분별이 없게 된다. 주의 광명[빛] 중에서, 오직 거기에서만 우리는 "빛을 보게 될 것이다"(시 36:9).

하나님의 영광이 진정한 우리 목적이고 그의 말씀이 우리의 법도인 동안은 우리는 '좋은 판단' 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자아의지의 함정과 사탄의 마수를 알아채고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만족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육욕적인 이성이 우리의 통제자가 될 때에는 어리석음과 혼돈과 재난에 스스로를 내던지게 될 것이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23절).

'나쁜 눈'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 내지 식별력이다. 본래부터 그 안에 얼마간의 지성의 빛을 지니고 있는, 그렇기는 하지만 아담의 타락을 통하여 죄의 오염으로 인해 무섭게 더럽혀지고 어두워진 이들이다.

우리는 죄가 우리안에 만들어온 대파괴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즉 인간의 식별력은 영적인 일에 있어 판단과 분별의 능력을 잃어왔으며, 그리하여 악을 선으로, 땅의 것을 하늘의 것으로, 거부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자연인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우매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자연인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의 지고성을 인정한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그러한 지식은 그들의 조물주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는 할지라도, 그의 영혼과 생명에 어떠한 영적인 감화력을 주지 못한다. 이에 대한 증거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자연인은 실제 생활에 있어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고 하는 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만일 그가 그러하다면 그의 동료들의 눈 앞에서는 범하기 두려워하고 부끄러워 하는 죄들을 감히 하나님의 목전에서 두려움도 떨림도 없이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깨닫지도 시인하지도 않고 있다. 왜냐하면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외부적인 원동력이 메말랐을 때, 그의 마음은 자기 안에서 무감각해지며, 인간이 주는 도움의 약속이 하나님 안에서 그가 갖는 어떠한 희망보다도 그를 더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창조주보다도 피조물을 더욱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또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죄를 짓고 있을지라도 징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행위로써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는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신 29:19).

비록 자연인이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함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는 경배의 올바른 방법을 전혀 분별할 수 없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상과 여러 형상들 앞에서 절하고 있으며, 겉으로는 참된 하나님을 존경하는 체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다(마 15:8).

이러한 점에서, 죄가 인간을 타락시켜 왔고 그 존재의 근원을 오염시켜 왔으며 저희의 식별을 어둡게 했다는 통탄할 만한 증거들이다. 이러한 점들이 거듭나지 않은 자의 '눈'은 나쁜 눈임을 오해의 여지 없이, 반박할 수 없이 증명한다.

비록 이성적 행동을 축복받았지만, 하나님이 계시며 이를 인정하고 경배하여야 한다는 지각을 부여받았지만, 비록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대하여 지적인 가르침을 받는 능력이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영적인 방도에 있어 그에게 전혀 유용하지 않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무감각하며 그분의 위엄에 감동받지 못하고 그분을 존엄하심을 경외하지 않는다. 그분의 선하심에 온화하게 되지 않으며, 그분을 바르게 경배할 수도 없고, 또한 그것이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 2:14)는 말씀이 너무도 자명하다.

그는 영적인 분별력을 갖거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유효한, 차츰 바꾸어지는 자식을 얻을 수 있기 전에, 그는 거듭나야만 한다(요일 5:20).♡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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