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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127]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127]

En Hakkore 2024. 7. 17. 11:26

금식 2(마 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은 금지 명령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금식할 때에 '슬피 울고' '곡할 것'을 요구하신 요엘 1:13, 14은 어떠한 조화를 이루며, 또한 금식할 때에는 반드시 비통하고 특유한 몸짓이 따라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대답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금식을 하는데 있어서 바로 그 기간 동안 슬픈 기색을 하는 것을 정죄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데, 경건한 느헤미야도 수심을 보였기 때문이다(2:2).

그 대신에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허식을 비난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사실상 회개하는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지극히 슬픈 기색으로 가장하였다. 이것은 주님의 다음 말씀에서 입증된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그러나 또한 이 말씀에 대해서,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에스라가 머리털과 수염을 뜯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9:3), 또한 여호수아와 그의 친구들은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썼다(7:6).

그러나 이 모든 경우는 마음의 깊은 슬픔을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는데 대해서 꾸짖고 계시는데,

첫째로, 이것이 그들이 금식하는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인 바 외적으로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일이었다.

둘째로, 여기에서 '흉하게 하다' 라는 말은 그들의 단정함을 흐트러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들이 금식한다는 것을 좀 더 잘 광고하기 위해서 창백하게 보이고 쇠약하게 보이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일에 자기들의 가정의 사생활을 지키고, 금식이 그 수단과 표징이 되는 거룩한 일을 수행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들은 마치 연극 배우처럼 밖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마음속으로 느끼지도 않는 온갖 표적을 자랑해 보였고, 자기들이 금식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믿어 주기를 바랐으며 슬픈 기색을 가장하였다.

그들은 온갖 통상적인 표현 방법을 이용해서 깊은 고통과 마음의 근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들은 머리를 먼지와 재로 뒤집어쓰고 얼굴을 수그리고 옷차림을 무시해버린 채 지극히 우울하고 낙심한 모습으로 찌푸림으로써 얼굴을 흉하게 하였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온통 외적인 모습으로만 자기의 낮아짐을 나타내 보였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마음은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브루스터  Brewster).

다음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인 금식에 알맞는 모든 외적인 의식과 표적들을 준수하는 가운데 많은 형식을 차리면서 금식을 실행하였다는 사실을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앞에서의 구제하고 기도하는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중요한 일이 결여되어 있다. 즉 마음의 진실과 성의가 없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얼굴은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하면서 완전하고 의롭다고 생각했으며, 영혼의 큰 의사나 중생도 필요치 않다고 느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자연인의 특성에 대한 실례를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내면에서 진리를 얻는 것보다 외적인 행위에 더욱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적인 행위만으로 만족하였으며 영으로  예배히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아합도 형벌을 두려워하여 일부러 외형적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였다(왕상 21:27).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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