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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123] 본문
금식 1(마 6:16-18)
경건한 자의 입장에서 공적인 금식이든 사적인 금식이든 그것은 모두가 구약시대에 국한된 관례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큰 잘못이다.
우리는 안나에 대해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눅 2:37)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건한 고넬료도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에 관해서 많은 빛을 얻고자 하였을 때에 금식하고 기도하였다(행 10:30).
안디옥 교회가 복음 안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구하였을 때에 그들은 "금식하였다"(행 13:3).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바울과 실라가 지교회들을 세우려고 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금식기도' 하였는데(행 14:23), 이것은 그들이 그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7:5에서 사도는, 어떤 특별한 요구를 할 때는 언제나 똑같이 특별한 것이 요구되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금식' 에 전념하는 것은 그들의 정상적이고 올바른 관습이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금식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금식이란 음식과 음료를 절제하는 것이긴 하지만 건강을 손상시키고 몸을 해칠 정도로 절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골로새서 2:23에서 금하고 있으며, 우리가 '일용할 양식' 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가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을 앙망하는 데에 음식이 방해가 되는 경우에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다.♡
그러한 금식은 다니엘이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였던" (단 10:3) 것처럼
첫째로 모든 맛있는 음식을 자제하는 것이다. 또한 지극히 빈약한 규정 식사를 먹으며, 인간 본성의 모든 즐거움을 삼가야만 한다(욜 2;15, 16 참조).♡
이 모든 것은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고 말한 바와 같이 스스로 괴롭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그 말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는, 오랫동안 음식을 절제한다는 것이지 단식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매주 금식을 지키고, 그것을 엄격하게 준수한다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영혼의 복음적인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금식과는 거리가 멀다.♡
단순히 입술의 움직임의 기도가 아닌 것과 같이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일도 금식은 아니다. 즉 고기를 삼가면서 동시에 달걀과 물고기로 배고픔을 채우는 것은 아무런 금식도 아니다.
만일 우리의 금식이 죄를 중심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구하고자 하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목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지 못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리고 당분간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욕구를 갖지 않도록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미신적인 행위일 뿐이며 일종의 불경건한 형식주의에 불과하다.
아무리 엄숙하고 품위 있게 금식을 실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단순하고 외적인 행위로 하나님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마음속을 감찰하고 계시며 만일 우리가 금식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같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무의미한 외모로써 지존자를 조롱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슥 7:5)고 물으셨다.
또 다른 경우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둘째 돌판의 계율을 아주 무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금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며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 어찌 금식일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5, 6)고 말씀하고 계신다.
훗날에 주님께서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라고 명하셨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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