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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104]

En Hakkore 2024. 7. 15. 15:07

구제에 대한 교훈(마 6:1-4)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1절).

우리가 행하는 행동의 가치는 그 행동이 나오게 된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가난한 사람을 단순히 습관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행동이다.

자기의 영향력과 능력을 증대시키려고 궁핍한 사람을 섬긴다면 세속적인 야망을 과시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이익을 조장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다면 그것은 탐욕스러운 욕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칭찬을 구하기 위하여 베푼 것이라면 자만심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자기의 동료가 당하는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한 것이라면 그것을 단지 평범한 인정을 베푸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을 존경하여 궁핍한 자를 섬기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의 뜻을 존경하여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일이다(존 브라운).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의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절).

'나팔을 불지 말라' 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외식하는 자' 라는 말은 중대한 말인데, 왜냐하면 그 말은 가면을 쓰고 가면 뒤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는 배우 같은 사람을 분명히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실제로는 독선적이고 사람들의 칭찬만을 구하고 있을 때에 자기들의 하나님을 가장 헌신적으로 섬기는 자들이며, 동료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그들은 경건하고 관대한 외양의 뒤에 숨어서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경꾼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자선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은 상'은 마치 뱀이 '흙'을 먹고 살듯이 천박한 마음으로 사는 자들의 칭찬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비난하는 죄는 보통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이며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는 것이어서 주님의 많은 백성들이 그 죄를 범하고 있다.

그 죄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을 판단하는 자로 삼고, 승인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끔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아니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 상하게 해드린 죄로 슬퍼하는 것보다, 옳은 일을 행하여 동료의 불평을 샀을 때에 더 비통해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책망보다는 인간의 비난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지는 셈이 된다.

우리의 동료가 하나님을 모욕했을 때 우리는 마음 깊이 상처받지 아니하는가?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보다 죽어야 할 인간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곤궁에 처해 있을 때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많은 위안을 주는가? 우리를 구해 주겠다는 친구의 세상적인 보증인가, 아니면 주님이 주신 약속인가?

Arthur W. Pink 산상수훈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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