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산상수훈 92] 본문
율법과 사랑 2(마 5:43-48)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은 거짓이 없고, 열정적, 적극적, 지속적이며 영원하다.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러해야 한다. 참된 자기애(self love)란 모든 우리의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영적인, 영원한 이익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러해야 한다. 참된 자기애란 우리의 행복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부지런히, 신중하게 추구하고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며, 재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이웃의 행복에 대해 자기 일처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애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기를 거짓 없이 즐기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일을 그 만큼 할 수 있음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듯이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도 진실한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된 일" 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이웃에게 베풀라고 요구하신 사랑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연민(compassion)이라 불리는 것을 훨씬 능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민이라는 것은 가끔 인간 가운데에서 지극히 흉악한 자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중시하는 마음에서 싹트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동료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중시하는 마음에서 싹튼 것도 아니고, 단순히 우리의 동물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선한 본성(good nature)이라 칭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짐승들이 다른 짐승들보다 더 좋은 본성을 가지듯이 어떤 인간들은 그의 동료들보다 더 온화하고, 더 샹냥하고, 더 겸손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온유함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자연적 애정(natureaffection) 또한 마찬가지로 설명된다.
전혀 신앙심이 없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아내와 자식에게 애정을 가지며, 심지어는 하나님이나 자기 자신의 영혼을 무시한 채 그들을 우상처럼 섬겨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일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에 대한 모든 이러한 애정으로는 그들의 영적이며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맹목적 사랑에 불과할 뿐이며 거룩한 사랑은 아니다.
마태복음 5장 마지막 여섯 절에서는 주님의 의도가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위대하고 보편적인 율법 계명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를 유대인 선생들의 그릇된 해석으로부터 구하고 그것의 진정하고 합당한 의미를 되찾자는 것임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앞 부분에서 행했던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도 먼저 랍비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한 다음 하나님의 교훈을 올바르게 적용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계신다.
그들은 이중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하나는 그들에게 친절한 자만을 '이웃'이라고 부당하게 제한시킨 잘못이다. 다른 하나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그릇되고 악한 결론을 끌어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현대 기독교계가 타락한 유대교와 얼마나 유사하게 가까워지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