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산상수훈 80] 본문
율법과 보복 2(마 5: 38-42)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불의 내지 정당한 이유 없는 위해와 부딪치게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처하여 스스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 대답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것을 율법에서나 복음에서나 우리에게 금하셨다는 점이다. 사적으로 보복하는 행위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분명히 금지되어 있다.
"너는 악을 악으로 갚겠다 말하지 말고"(절대로, 생각으로조차도 : 잠 20:22). 어느 날 이를 위반할 기회를 가지리라는 생각조차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바라면 안 되며, 더군다나 그와 같은 것을 결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일을 원해서도, 결심해서도 안 된다. 분명히 악의에 찬 복수를 하는데 있어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기대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행한 자에게 생각으로나 말로나 혹은 행위로나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차라리 피해를 감수하고 모든 현세의 심판자이신 그분께 맡겨야 한다.
이 의무가 우리의 타고난 성향과는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어보기로 하자.
첫째로,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백히 드러내신 뜻이며 하나님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둘째로, 복수는 하나님의 권한이며 만일 우리가 받은 바 피해를 개인적으로 보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탈취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도록 한 본보기를 남겨 두셨다.
곧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그는 잔인하고 부당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만일 우리가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분명히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그렇다면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이 교훈이 어느 범위에까지 적용되는가 하는 물음에 부딪치게 된다.
그 말씀은 절대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제한 범위도 인정되지 않고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는가? 기독교인은 모든 피해를 수동적으로 감수해야만 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유추로부터 지침을 찾아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부수적인 구절들에 나타난 가르침을 확인해 보아야 된다. 만일 이와 같이 해 본다면, 그 구절이 대체적인 적용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지,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구절에서 악한 자에 대한 제한 없는 무저항의 교리를 추론해 낸다면 그 가르침을 곡해하는 것이며, 참뜻보다 자구 그 자체를 더 중히 여기는 일이다.
즉 실족케하는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그리고 실족케 하는 오른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마 5:29, 30)을 받아들여 문자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구절에 담겨진 주님의 의도를 전적으로 그르치게 될 것이다.
첫째로, 다른 구절에서의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조건적이고 보편타당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분영히 금하고 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해를 가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 방법을 설명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 말씀은 곧 악한 자에 대한 분명한 대항이다. 이는 그릇된 행위에 대해 도전하고, 범죄를 심리하며 범죄자를 징벌하고 있다. 악에 대항하는 길에는 신체적인 힘의 응징 이상의 다른 방법들이 있는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