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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77]

En Hakkore 2024. 7. 13. 22:53

율법과 보복 1(마 5:38-42)

둘째로, 그러한 함정은 전체 사회에 유익한 것으로서, 이 법규는 단지 주인과 종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적용되었다.

그것은 장자로부터 약자를, 폭력주의자로부터 평화주의자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어졌다. 이는 공동체에서 법과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현명하고 필요불가결한 수단이었다. 신명기 19장 마지막 절들을 볼 때 분명해진다.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19, 20절).

징벌이 가혹하게 즉석에서 시행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성 잘 내는 것과 사악한 것을 제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잔인하고 야만적인 존재로서의 법은 여기에 이르러서 가장 공정하고 자비로우며, '악' 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도록 고안되어진 유익한 것이 되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보복 재판법은 오늘날 우리의 법률서에 있어서도 틀림없이 시실이어야 하며, 공평하고 확고하게 우리 재판관들에 의해서 시행되어야 함을 지적해 두자.

어떠한 것도 폭력 죄가 급속히 증가되는 경향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참으로 어리석고 나약한 것이 현 세대여서, 치명적인 징벌의 폐지와 신체적 징벌의 철폐로 범죄가 증가일로에 있다.

이와 같이 치명적인 징벌이 대부분 느슨하게 집행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가장 높은 살인율에 직면하고 있고, 신체적 징벌이 완화됨으로써 잔인한 폭력 죄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다른 사함들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하지 않는 이들이 그들 자신의 몸은 몹시도 아까워 한다. 그러므로 최상의 억제법은 법이 그들에게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호되게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말하는 일이다.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울 필요는 없다. 이 율법의 가혹함이 대중에게 끼칠 이익은 그 가혹함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그 본보기적인 징벌은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같은 악행을 시도하지 않도록 경고하게 될 것이다" (신 19:19~21)에 대한 매튜 헨리의 주석에서).

재판관들은 결코 사악한 자를 개선시키거나 혹은 타락한 자를 방치해도 좋다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일이 없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롬 13:4)가 되는 '하나님의 사자'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련한 과부의 원한을 보응해 주기를 거절한 재판관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눅 18:2) 자로 친히 증언하셨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물론 나는 모든 독자들이 다 동조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으며, 호된 비난도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널리 퍼져가고 있는 도덕적인 방종과 부도덕한 감상의 요인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바를 지적해야 하겠다.

나는 서글픈 현 시대의 원인은 설교자에게 있다고 주저하지 않고 비난한다. 설교자의 불성실이야말로 전 기독교 세계에 현재 만연되고 있는 무법성을 책임져야 할 가장 큰 요인이다.

지난 수 세대 동안 수많은 성직자들은 이 은혜의 세대에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고 말하면서 이를 집어던져 왔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제지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 제거되었고, 육체의 욕망대로 방종하는 것을 묵인하게 되었다.

비단 하나님의 율법이 거부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도 전반적으로 오도되어 왔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곡해시켜 왔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 그리고 진노는 소개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만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로 교회에 나가는 무리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 오십 년 동안 수많은 성직자들은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영원한 징벌에 대해서 침묵하는 죄를 범해왔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만을 강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만연되어져 왔는데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이이다.

병적인 감상이 성직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전 교인들에게 전염되었고, 이렇게 뿌려진 악은 이제 전 국가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양심은 마비되고, 정의에 대한 요구는 질식되었으며, 감상적인 개념이 이제 만연되었다. 영원한 징벌에 대해서 무시하였기 때문에(암암리에, 혹은 많은 경우에 공개적으로), 교회의 권징도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들은 지리의 시행을 거부하고, 가공할 만한 범죄에 추파를 던졌다. 필연적인 결과로 가정에서의 규율은 파기되고, 몹시 감상적이고 줏대 없는 '여론'이 발생되었다.

학교 교사들은 어리석은 학부모에게 위협당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이 점점 어떠한 결말이 나올지 우려하지 않고 제각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만일 어떤 판사가 소신있는 용기를 가지고, 노파에게 위해를 가한 자에게 짐승 같은 놈이라고 말한다면 강력한 항의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여기까지 사태를 진전시킨 요인들, 즉 불성실한 성직자, 영원한 징벌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그릇된 제시, 그의 율법에 대한 거부, 교회가 성경적 권징을 행하지 않는 것, 어버이다운 권위의 파기 등에 대해서는 실감하지 않고 있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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