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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82]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82]

En Hakkore 2024. 7. 14. 11:04

율법과 보복 2(마 5:38-42)

이제까지 지적해온 대로 성경의 모든 진리는 다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쪽으로 치달은 잘못들의 예는 교리에서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상당하다.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는 말씀에 대해 부적당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이 은혜의 세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행동들을 은혜의 원칙에 따라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뜻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의 원칙이 모든 다른 행동 원칙들을 압도하고 삼켜버리게 됨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공의의 필요성, 성결(거룩함)에 대한 요구도 또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할 때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롬 5:21) 왕노릇하며, 의를 희생시키지 않게 된다. 같은 규칙이 다른 문제들에도 적용된다. 법에 의지하기를 삼가는 것은 인생의 건전한 규칙이다.

소송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지혜이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논쟁을 시민 법정으로 가져갔다하여 꾸짖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법에 호소하지 않아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사회적 의무를 무시한다면 무슨 권리로 공동체의 사회적. 시민적 특권을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신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자를 용서해 준다면 우리의 이웃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만일 내가 내 집에서 강도를 붙잡았을 때, 나는 사회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 안전을 위협한 임무일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는 규칙을 무효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규칙을 입증하는 것이다.

주의를 집중하라. 그렇게 하여 우리는 문자적 의미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교훈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분명한 명령이며, 또한 그의 명령은 우리를 구속(속박)하고 있다.

그의 제자는 화평과 온유의 사람이어야 하며, 과실을 견디고 손해를 참으며 고난을 감수하는 자인 동시에 동정심과 순전한 신앙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어야 한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정신은 악이다.

즉, 항상 말다툼하며 언제나 방어적인(화를 잘 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법에 의지하는 행위는 대개 적절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그 모든 것은 부정적인 측면에 속한다. 동시에 우리가 살펴보아온 대로 긍정적인 면도 역시 있다.

신은, 단지 그것에 의해 악이 극복되어질 수 있는 경우에만 악에 대해서 응대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죄인을 징벌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바라고 찾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이었거니와 또한 우리의 생활이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본문에서 행악자를 '악한 자'라고 부르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악한 자의 속성이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임을 뚜렷하게 가르쳐 준다.

가해자에게 이러한 호칭을 붙였으면 만일 우리도 이같이 악한 정신에서 보복한다면, 반드시 상대방이 속한 그 부류에 자신도 끼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심 있게 상대방의 과실을 견디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오직 선한 자와 악한 자, 두 부류가 있으며 모든 일에 선으로 행하는 것이 전자의 표지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악한 자를 닮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반면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로나 행위로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다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인 것이다. 고리대금업자와 착취자, 모리배, 사기꾼, 도덕을 파괴하는 계획에 동참한 사람들이 그러하며,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자들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모든 일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비록 적은 수입을 얻게 된다 해도)에 종사해야 한다.

본래 타락한 인생은 야생 짐승이나 사나운 짐승과 유사해져서 '들나귀 새끼' (욥 11:12)나 사자, 표범, 이리, 독사(사 11:6-8)로, 다른 생물들을 해하고 삼키는 본성을 가진 것들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의 기적으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영적 생명을 주사 그들을 자신과  화해하도록 하셨을 때 그들은 적의와 사나움을 내버리고 서로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 말씀이 성취되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사 11:9). 그의 백성들이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니"(미 4:3), 즉 피 흘리는 무기를 유용한 도구로 바꾸는 것,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국의 특성이다.

사람이 진실로 거듭났을 때 그들은 악의와 분노를 버리고 선을 행하고 지지하게 된다. 잔인한 집행자로부터 평화의 복음 설교자로 변신하였던 바울 사도의 경우가 특히 그 좋은 본보기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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