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산상수훈 52]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52]

En Hakkore 2024. 7. 12. 10:47

율법과 살인 2(마 5:21-26)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는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가 한 푼이라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 26).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좋아하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연옥이란 교리를 입증할 때 사용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와 같은 구절을 적용해야만 했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유리하게 보이게 하는 어떤 구절이라도 성경에서 찾아내려고 그들이 얼마나 고심하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로마 가톨릭교의 주석가들 사이에서조차도 서로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송사하는 자' 는 자신의 율법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재판관' 은 그리스도로, '옥리' 는 천사로, '옥' 은 연옥으로, '길' 은 지상에서의 일생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대가 지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화해하라. 그대가 그리스도 앞에 재판받으러 나아갈 때 천사들로 하여금 너를 연옥으로 던지게 하여 네가 모든 가벼운 죄들을 완전히 속죄할 때까지 거기에 머무르게 될까 두렵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야 할 화해의 규칙을 규정하신 문맥을 극단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해석은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대적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죄인 자신이 가벼운 죄들에 대한 속죄를 치른 자들로 되는데,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충분하다는 시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 주석가들은 25절과 26절이 죄인이 처한 심각한 위태로움과 복음을 믿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을 극적으로 묘사한 비유라고 간주한다.

동료에게 손상을 입힌 행동은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우리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송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해의 길이 복음 가운데 드러나 있고 우리는 즉시 이것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저버리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의 문을 닫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때는 어떤 심판이 우리를 기다릴 뿐이며 지옥의 감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어떠한 만족할 만한 보상도 치를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영원히 고통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개념은 주석가의 독창력을 입증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암시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잘못을 행한 쪽에서 자기가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을 인정하고, 입힌 손상에 따라 알맞은 보상을 함으로써 형제에게 화해를 이룰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친교도 깨어져 있는 것이며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용납될 수 없다고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오만하고 완고하며, 화해의 의무에 굴복하여 복종할 때까지는 얼마나 더딘지를 아시면서도)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해를 입힌 사람이 손해를 입은 사람과의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 왜 유리한가 하는 이유를 지적하신다.

말하자면 고통을 받은 사람이 상대방을 고소하여 비용이 드는 소송에 연루시키거나 혹은 투옥당하게까지 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사화하라" 는 말씀은 곧 '형제와 화목하라' 는 말씀과 같다. 여기에서 '고발하는 자' 라는 말은 서로 논쟁하고 반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이름이다.

당신이 노하게 만든 사람과 '사화하라.' 그에게 끼친 손해를 보상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회복하라. 손해를 입은 사람이나 채권권자가 치안판사가 있는 법정에서 그 소송사건을 재판하려고 당신을 고발할는지도 모른다.

법정으로 가는 동안은 아직 서로 간에 타협하여 협정을 이룰 시간이 있다. 그러나 일단 판사 앞에 나가면 그 일은 이미 당사자들이 처리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 법정의 판결에 맡긴진다. 법정은 준엄한 정의에 따라 공정히 판결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다할 것이다.

위에 계시된 견해는 유명한 칼민이 주장한 것이다. "만일 이 경우에 재판관은 하나님을, 송사하는 자란 악마를, 옥라란 천사를, 옥이란 연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로마교도들에게 동조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공정과 친절의 원리를 좇아 행동하기보다는 엄숙한 율법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수많은 위험과 공정과 화해를 이룰 것을 더욱 진지하게 권고하시려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음이 분명하다고 해석한다면, 도대체 본문의 어디에서 연옥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25절과 26절의 말씀의 뜻은 23절과 24절 사이에서 주신 명령에 유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을 경고하시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낮추어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가혹하게 대우하여 고소한다 할지라도 놀라서는 안 된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범죄한 자를 고소하시고 투옥시킬 수 있는 자신의 위엄 있는 직책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102

'강해시리즈 > 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상수훈 54]  (0) 2024.07.12
[산상수훈 53]  (0) 2024.07.12
[산상수훈 51]  (0) 2024.07.12
[산상수훈 50]  (0) 2024.07.12
[산상수훈 49]  (0) 2024.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