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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135]

En Hakkore 2024. 6. 20. 11:26

만나(출애굽기 16장).

묵상은 사람들이 아주 거의 상실된 기술(a lost art)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의 문제의 근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러 번 읽은 성경구절을 기억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을 알고 자주 불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그 구절을 마음에 되새기지 않고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눅 2:19).

당신은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했다'는 사실에 유의한 일이 있는가? 묵상은 성경의 구와 절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데 놀라운 도움을 준다. 이 묵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비유를 들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성경 중에서 가장 익숙한 구절 중의 하나인 시편 23:4을 골라 보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자, 이 말씀을 묵상하려고 할 때 우리는 각기의 단어나 표현을 따로 분리한 다음 그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 구절에서 맨 먼저 내가 주의하게 된 것은 절이 시작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내가 골짜기를 걷게 될 때에" 라고 하지 않고 "내가... (비록) 다닐지라도" 라고 하였다. 나는 이 사실을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겼다.

언젠가 내가 음침한 골짜기를 걷도록 부름을 받는 것은 확실치 않다는 것인가? 그리고 나서는 나는 고린도전서 15:51에서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다 변화되리니" 라는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그 다음에야 왜 성령께서 이 시편을 이같이 시작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이 절의 중심 되는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부분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신자가 죽게 되면 통과하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왜 '골짜기' 를 걷는 것으로 비유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같은 묘사는 어떤 생각을 제시하는가? 이 질문을 내 마음속으로 몇 번 반복하는 동안 얼마 되지 않아 곧 생각(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그렇게 됨)이 떠올랐다.

'골짜기' 란 평화, 비옥한 아름다움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는 곳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골짜기' 란 오르기에 힘들고 위험한 '산' 과 대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겹고 위험한 산을 오르는 것과는 대조되게 죽음을 즐겁고 안전한 골짜기를 걷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제 절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돌아가 각 단어들을 사려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신자가 그의 지상 순례의 종착에 이를수록 죽음이 다만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비록 무서울지라도 뛰지 않고, 걸어가는 것을 보라. 그리고 '(통과하여) 다닐지라도' (walk through)라는 말을 살펴보라.

그는 '골짜기' 에서 머물지 않고 그것을 걸어서 통과한다. 죽음이란 다만 신자가 이 죄와 슬픔의 무대로부터 영광과 복락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한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이 '골짜기' 가 사망의 '음침한(그늘진) 골짜기' 로 불리는 것과 관찰해본다. 왜 그렇게 부르는가? 나는 성급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만일 서두르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하여 각 단어들을 나누어 심사숙고함으로 그 독특한 감미로움을 캐어낼 것이다. '그늘'이란 무엇인가? 아, 그늘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종종 놀라는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렸을 때 그림자 때문에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그늘 쪽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갔다면 그것이 우리를 상할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아주 빨리 알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죽음의 골짜기를 무서운 환영으로 느껴왔던가! 이러한 불신앙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얼마나 이 그늘을 무서워했는가! 오 사랑하는 믿음의 벗들이여, 주 예수의 재림 전에 죽음의 두려움이 당신에게 엄습해 올 수 있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 골짜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불리는 것은 그 '그늘'이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편의 신자가 이 복되고 아름다운 표현의 축복을 충분히 파악하여서 죽음이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라 '골짜기' - 평화롭고 가기 쉬운 - 를 지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닫고, 그리고 이 골짜기에는 '그림자'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이제야 그는 넘치는 기쁨의 확신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라고 외친다.

여기서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례를 보았다. 묵상이란 음식을 먹을 때 씹는 것과 같이 말씀을 정독하는 것이다.

하루를 시작할 때에 말씀의 한 구절을 택하여, 종이에 적어서, 어디를 가든지 가지고 다녀라.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시 읽으면서 기억을 새롭게 하라. 그 말씀을 놓고 기도하며,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과 귀중한 교훈이 드러나 이 구절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나님께 구하라.😎

그런 다음 각기의 단어를 따로따로 숙고하라. 그 구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 깊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라. 시편 34:7 말씀을 묵상한다고 생각해 보자.

"여호와의 천사(The angel od Load)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 보라. 왜 그(the) 천사가 여기에 있나? 그는 누구인가? 진 치고(encampeth) 라는 말은 완료진행 시제를 사용했는데 이 형식이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러' 라고 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주를 '경외하는 자들' 이라고 했는데 나도 그들 중에 속하는가?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라고 했는데 무엇으로부터 건지신다는 말인가? 다른 곳에 있는 말씀에서 '구원하다(건지다)' 와 '구원(건짐)' 에 대한 답을 찾아보라.

소화시키는 일: 이것은 자기 것으로 삼음과 섭취의 결과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주요한 목표이다. 내가 먹은 음식은 체력 소모를 보충해 준다. 내가 씹어 소화한 음식은 피와 신체조직으로 변화되어 건강과 힘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소화 된 음식은 발걸음의 활력과 팔의 힘과 얼굴의 생기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체조직은 신체에 침투하는 세균을 방어하는 작용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영적인 사람에게도 흡사하다.

나의 영혼이 섭취한 음식은, 만일 잘 소화만 되었다면 새로운 나의 체력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믿음에 양분을 줄 것이며 나날의 행함과 섬김에 필요한 활력소를 공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침투하는 유혹의 세균들을 대항하는 호위병이 될 것이니 곧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하심과 같다.

그렇다면 여기에 이제까지 우리가 고찰한 위대한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먹도록 주신 것이요, 그리고 먹는다(feeding)는 것은 성경의 원칙과 교훈들은 반드시 나의 생활에 부합되어야 한다.

말씀이 나의 행함을 위한 조절장치와 섬김을 위한 동력이 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소화-흡수가 된 것이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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