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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167] 죄와 패배와 심판(수 7:1-26)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167] 죄와 패배와 심판(수 7:1-26)

En Hakkore 2024. 6. 11. 11:34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여기서 조심스럽게 관찰할 부분이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을 낮추어 그냥 티끌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보좌와 임재의 상징물인 여호와의 궤 앞에서 그렇게 했다는 점이다. 그런 자세와 또 그 위치 설정은 지극히 적절했다. 왜냐하면, 거룩한 궤야말로 극심하게 무시를 당했기 때문이다!

요단 강을 건널 때와 여리고 성을 돌며 행진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높이 들어 올렸고, 그리하여 그들의 승리가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이 정당히 영광 받으시는 데에 달려 있음을 이스라엘에게 널리 알렸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친히 그분의 백성을 위해 길을 만드심으로써 그분의 영광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그 합당한 위치에 올려놓지 못한 것은 여호수아의 쓰라린 잘못이었고, 그것이 바로 아이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굴욕을 당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정탐꾼들의 그 교만한 제안을 귀담아 들어 반영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 됨이 깨어진 것은 물론이요, 언약궤의 인도와 도움이 무시되었고,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진노를 발하신 것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제 그 언약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 것은 바로 이런 잘못을 인식한 까닭이었다고 믿는다. 과거에도 단 한 번 이스라엘이 이교도들의 손에 패퇴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확실한 빛을 얻기 위해서는 그 두 사건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광야에서 일어난 패배와 지금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패배는 그 원인이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교만이었다.🥺

광야에서 패배한 사건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위기 직후에 일어났다. 곧 이스라엘이 불신앙에 빠져 여호수아와 갈렙의 조언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열 명의 정탐꾼들의 하나님을 깎아내리는 보고에 귀를 기울인 때였다.

그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은 후에, 그들의 죄에 대해 슬피 울며 고백하는 일이 있은 후, 그들은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우쳐 교만하여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선포했다.

모세는 즉시 그들을 꾸짖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가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민 14:41-45).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미친 자신감으로 삼천 명이 언약궤가 없이 아이로 올라가 싸웠다가 패배를 당한 것이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여호수아의 이러한 행동과 자세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서 자신을 낮추는 하나의 표현이었으며, 자신의 실패에 대한 아낌없는 자기 정죄였으며, 동시에 확고한 소망의 자세의 표현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러냐고 물을 분들도 있을 것이다.

언약궤의 덮개를 이루는 것이 "속죄소" 였는데, 그 곳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사에 근거하여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죄소"를 거론하는 것이 본문을 너무 무리하게 억지로 비트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수아가 "저물도록" 계속해서 그렇게 있었다는 성령의 보도를 볼 때에 반드시 그렇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라 여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미 다음과 같이 지정해 놓으셨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야말로 극히 복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출 29:38-39).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저녁 제사 때까지 언약궤 앞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 어린양을 통해 긍휼을 얻음으로써 "화평의 응답"을 듣기를 기대하고서 그렇게 했다는 우리의 생각을 확증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분은 열왕기상 18:36; 에스라 9:4, 5; 다니엘 9:21들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Arthur W. Pnik 여호수아 강해 p368

● 열왕기상 18장 36절.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 에스라 9장4, 5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 다니엘 9장 21절.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