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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127]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27]

En Hakkore 2024. 6. 7. 12:30

모세의 믿음 5(히 11:26-27)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하지 않고".

모세의 용기를 여기서는 세 번으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자인 "왕"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었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잠 19:12).

이러한 두려움을 몰아낸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믿음이 행사될 때에는, 그 어떠한 공포도 성도를 놀라게 할 수 없다. 아, 사랑하는 이여, 애굽을 떠난, "특별히 애굽의 종교를 떠난" 사람들은 사람의 노함을 만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에 의해서 외식적인 경건의 꺼풀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때에 세상적인 종교인들처럼 실망의 증오심과 잔인한 행동과 본색을 드러내는 처사로 나오는 자들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외식자의 "노함"도 바로의 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아, 여기에 모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모세는 "참았다". 그것이 모세의 마음의 상태를 말해준다. 그는 매력적인 영예들을 견뎌냈고, 애굽의 왕궁의 찬란한 즐거움에도 "참아냈다". 반복되는 바로의 타협도 견뎌냈다. 그리고 자기 행동이 불러올 수 있는 폭력도 참아냈다.

그의 용기는 단순히 번쩍하는 섬광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또는 순간적인 반응도 아니었다. 그의 용기는 정말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었다. 오늘날 가련하고 점점 하향세를 취하는 기독교국에서 이러한 믿음과 그 믿음이 가진 거룩한 담대함의 복된 열매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

세상적인 중심이 사방에서 성령을 소멸하게 될 때에 어떻게 달라질 수 있겠는가? 주권적인 은혜로 영문 밖에서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은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을 아주 싫어하여 조심하게 하옵소서.

"참았다"로 번역된 말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학자들은 그 말의 힘과 용기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악을 이기고 결연하고 용기에 찬 자세로 위험을 극복하는 자세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악과 위험들 속에서 힘이 잦아들기는커녕 끝까지 지탱하는 것을 말한다. 애굽을 떠난 이 믿음의 행사를 보인 모세의 확고한 자세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말이었다. 오랫동안의 어려움들과 만나야했고, 그는 거듭해서 임금의 위협을 받았다.

거기에 더하여 믿지 않은 자기 형제들과 큰 갈등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신령한 용기와 결심을 가지고 자신을 지탱시켜 끝까지 그 의무를 감당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의 힘이 무엇으로 새롭게 되었는가?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늘 보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 속에 그러한 결심을 일으켰던 것은 어떤 고집불통의 바보스러움이나 완고한 무고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늘 마음에 생각하여 부단히 그것들로 마음을 사로잡히게 한 것이 그러한 결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우리는 "부단한 마음에 사로잡힘" 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유심히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본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를 '보았기' 때문에 참았다"고 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말한다 - 이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행동이었다!♥

우리의 분량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며"(시 16:8)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용기를 건전하게 지탱하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진수가 된다. 다른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고통들과, 시련들, 세상의 매력과 소동, 사단의 공략들에서 건져내게끔 할 것이 없다.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하나님의 본질적인 국면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시다(그는 절대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나).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자주 말하는 것이다(롬 1:20, 골 1:!5, 딤전 1:17). 그러나 여기서 그렇게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모세가 그러한 조건과 상태에 있었고 모세는 그러한 일을 해야 했다. 거기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어 나갈 때에 자기 감각으로, 자기의 육신적인 눈으로 현재의 도우심을 분간해 낼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려면 마음의 특별한 행동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여기서 모세가 그렇게 한 것으로 말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았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을 믿음으로 보았다"(J. Owen).

이 "보이지" 아니하는 이란 말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어떠한 형상을 만드는 것이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그것은 죄악이다). 또한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떤 눈에 보이는 것의 모양을 따라 하나님을 그려보므로 이해를 도모하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그는 우리를 보신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참았으며".

"여기에 모세의 믿음의 이중적인 행동이 그려져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편재성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고 이해하는 것. 둘째로, 그러한 하나님의 편재성과 능력과 미쁘심을 따라 하나님을 확고하게 신뢰하되, 어느 때나 어느 경우에서나 그렇게 하였으니 그는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나 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기를 보호하실 수 있으시며,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시는데 미쁘시다는 사실을 믿었고 의뢰했다"(J. Owen).♥

하나님은 믿음에 합당한 대상이시다. 하나님은 믿음의 의지하는 대상이고, 모든 선을 믿음으로 기대할 대상이다. 믿음은 모든 영광을 그 하나님에게 돌린다.

오, 믿음의 놀라움은 탁월하며, 믿음은 영원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무한한 대상들을 가진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당신의 백성들을 거스리는 것 같은 모습를 보이신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심을 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시련과 비참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몸이 죽어 장사되고 먼지로 돌아간다.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바라본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보게 하는 믿음의 그 놀라운 능력이 생성되고 자라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님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을 약화시키고 허물어뜨리는 것들을 피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믿음을 자라나게 할 책임을 지고 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려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적은가.♥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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