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13]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13]

En Hakkore 2024. 6. 6. 11:42

모세 부모들의 믿음 5(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참으로 수많은 주석가들이 감상에 젖어 이 구절의 의미를 아주 놓쳐 버리는 모습은 정말 깜짝 놀랄 일이다. 출애굽기 2:2은, 그 어머니가 "그 준수함을 보았다"고 진술한다. 히브리어의 "토브"(tob)는 하나님께서 자기 창조물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완전함을 선포할 때 사용하였던 어휘와 같은 것이다(창 1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점을 통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세가 그 부모들에게 그처럼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여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모세를 보존하기 위해 특별한 고통을 감수하도록 한 것은 그 아이의 지극한 준수함과 아름다움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육체적인 차원에서 푸는 것밖에 되지 않으며, 사실상 여기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상충된 것이다. 히브리서 11:23은 모세 부모들이 "믿음으로" 행동하였음을 뚜렷이 확증한다. 그 부모들의 행실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로마서 10:17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아므람과 요게벳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구약에 기록되지 않음).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말씀이 그들의 확신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들이 행동했던 것에 동기적인 힘을 제공했다. 그들이 요셉의 예언을 통해서(창 50:2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시려 한다는 것을 알았듯이, 아브람(15장)에게 주신 예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하는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1:23이 무언가 더 명백하고 특별한 것을 지시한다고 확신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부모들에게 그 아이가 약속된 구원자가 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이 거의 틀림없다. 주께서는 그 어린 아이에 대하여 그 부모들에게 미리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음에 틀림없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이 계시를 그들은 "믿었다" 믿되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믿었다. 때가 되어 모세가 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 아이가 합당한 아이'임을 알았다. 그것은 '믿음으로 분변한'일이었다. 그저 단순히 본성에서 우러나온 감탄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7:20에(백스터의 원어대조역 성경에 의하면) "때에 모세가 태어났고 하나님께 아름다웠다"고 선언한다. 그 말씀은 신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나타났음을 지시한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특별하게 열납되었음을 인식했다. 그 부모들은 모세 안에서 무언가 주목할 만한 것을 지각했다.

그것은 그 어린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증표였다. "아마 특이한 것에 대한 약속이 되는, 이른바 장래 탁월함을 보여 주는 어떤 증표가 그 어린 아이에게 찍혀져 있었을 것이다"(J. Calvin).

"그가 큰 일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전조로 그에게 주께 속한 아름다움이 찍혀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써 빛났을 것이다(출 34:29).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행동을 해야 하는가. 또한 그의 이름은 성경 속에서 얼마나 빛나야 하는가"(M. Henry).

모세 부모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계시에 굳건히 섰고, 이제 하나님께서 바로 이 아이라고 가르쳐 주는 표증을 통해서 믿음이 확증되었다. 그리하여 그 무모들은 그들 자신의 안전보다 아이의 안전을 더 앞세워 생각했다. 그것은 단순히 결과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 속에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이 있었다(11:1). 그 결과 "그들은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육정으로 지극히 아름다운 아이에 대해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들이 그 아이에게 행한 것은 "육정"이나 "열중"에 빠져 행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들의 "두려움"을 깊게 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어린 아이를 감탄하면 할수록 그 어린 아이가 다칠까봐 더욱더 두려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6:7; 사무엘하 14:25; 잠언 31:30이 너무나 명백히 보여 주듯이, 단순한 아름다움의 탁월함에 대한 확실한 증표는 결코 아니다. 갓난 모세는 "하나님께 아름다웠다"(행 7:20). 아므람과 요게벳은 이 점을 인식하고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먼저 그들은 석달 동안 그들을 "숨겨 두었다"  그리고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수가 갈대 사이에 두었더라"(출 2:3).

아마 애굽 사람들이 석달마다 한번씩 히브리인의 집을 수색했던 것 같다. 모세 부모들이 지금 행동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귀한 아기를 죽음의 "강가"(출 1:22)에 놓았다는 것은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세를 갈 상자에 넣었을 때 모세 부모들의 믿음이 흔들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전혀 동조할 수 없다.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한 어떤 합법적인 방편이 더 이상은 안전하지 못할 때 다른 방편을 찾아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마 10:23).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이 서로 맞아들어가는 적이 흔하다. 그런 경우에 본성은 역사하도록 허용받는다. 그런 경우에도 은혜가 왕노릇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렇다. 모세의 부모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행하고 무엇을 할지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다("믿음으로"라는 말이 분명히 지시하듯이).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방도와 그들 자신의 느낌이 서로 맞아들어갔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와 우리의 본성적 정의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바치라 요구하실 때와 같이 말이다.

그때는 더 낮은 자의 요구를 높은 자의 요구에 복종시켜야 한다. 인간적 정의의 흐름이 하나님의 명백한 교훈과 충돌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인간적 정의를 따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본성의 도움을 취하도록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6).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451

'강해시리즈 > 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Hebrews 115]  (0) 2024.06.06
[Hebrews 114]  (0) 2024.06.06
[Hebrews 112]  (0) 2024.06.06
[Hebrews 111]  (0) 2024.06.06
[Hebrews 110]  (0) 202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