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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104]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04]

En Hakkore 2024. 6. 5. 11:42

야곱의 믿음 8(히 11:21)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창 48:17,18).

우리는 여기서 제멋대로 내버려 두면,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의 의지란 언제나 하나님을 반대한다는 것을 본다. 요셉은 그 문제에 대한 자기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서슴없이 내보내었다. 그것이 자기 체면을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지막에는 순순히 응했다.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야곱의 믿음이 가장 빛났던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나도 안다"는 말을 반복한 것은 그의 믿음의 큰 힘을 드러낸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롬 10:17),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복종했다.♥

야곱은 더 이상 "사람의 뜻"에 좌우되지 않았다. 히브리서 11:20의 이삭이 "육체의 뜻"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믿음은 사람의 뜻과 육체의 뜻 둘 다를 극복했다. 사랑하는이여! 때로는 믿음이 사랑하는 자의 소원과 뜻을 묵살해야 하는 때가 종종 있음을 배우라!

이스라엘이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요셉의 각 아들들을 축복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분명히 그것은 보는 것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보는 것으로' 하였다면, 이 두 어린 귀공자들이 언젠가는 자기들이 태어났던 나라의 애굽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들이 각 지파로 나누어진다는 것보다 더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어린 동생이 그 중요성과 숫자에 있어서 형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것보다 더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E. W. B.)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9).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백성들과 버리운 자들을 크게 구분하실 뿐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다룸에 있어서도 육신적인 측면이나 신령한 측면에서 다 동등하게 다루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다더 친밀하게 나타내 보이시는 은총받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다더 풍성한 분량을 주셨고, 보다더 많은 위안을 주셨다. 열 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세 사도에게 은혜를 더 베푸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진다.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특권을 가지고, 더 큰 능력과 은사들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 "달란트"는 동등하게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세 달란트,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가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하지 말자. 모든 사람을 다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가진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사도가 여기서 어떤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약간의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적으로 신약의 계시로 생각한다(모세처럼 "심히 두렵고 떨었다", 히 12:21).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47:31에 기록된 것을 넌저시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 관점과 관련하여 파생되는 한 가지 난제는, 여기 히브리서에서는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하였는데, 창세기에서는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오웬(Owen)의 견해를 따른다.

"두 성경 기자들이 묘사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야곱이 침대 머리맡을 향하고 그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머리를 숙인 것이 틀림없다." 야곱이 "경배"하게 된 것은 다음의 연유에서이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로 인애와 성심으로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창 47:29,30).

야곱이 어떤 감상적인 울적함 때문에 자기 시신을 거룩한 땅에 묻어 달라고 소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역사였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의 복된 표출이었다. 야곱이 자기 장례의 화려함과 장관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처럼 염려한 것은 그가 묻힐 "장소"였다.

그는 자기 뼈가 애굽의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 생전에 그들과 어떠한 교제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죽더라도 그들과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별된" 백성들임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니 그는 자기 조상들의 무덤에 장사되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언약에 있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하나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로,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계속 머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적당한 때가 되면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 주었고, 그럼으로써 그 약속된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믿음을 그들에게 확고히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넷째, 마치 자기가 그들을 대표하여 그 땅을 먼저 차지하러 가는 것 같은 뜻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다섯째, 가나안이 하늘의 모형, "더 나은 본향"(히 11:16),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영원한 안식처의 모형임을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요셉더러 자기 환도뼈 밑에 손을 넣으라는 것은 맹세의 몸짓이었다(창 24:2,3). 마치 오늘날에 있어서 손을 올리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야곱이 그렇게 한 것은 그 아들 요셉의 순결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야곱의 부탁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 또한 그것이 자기가 죽은 뒤에 있을지 모르는 바로의 어떤 대적을 예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창 50:5,6 참조). 야곱은 그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기에게 남아 있는 온 힘을 다 기울여 똑바로 앉아서 몸을 굽혔다. 그런 자세로 몸을 가누기 위하여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여기서 성령께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야곱의 경건한 몸짓을 언급하는 것은, 지존자에게 예배하는 자는 합당한 몸의 자세로써 영혼의 내적인 경건을 나타내는 것이 합당함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을 다 구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을 통해서 존귀를 받으셔야 한다(고전 6:20).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섬길 수 있을까? 기도할 때 앉거나 누워 있는 것은 경외심과 열심을 나타내기보다는 게으름과 무분별함을 더욱더 드러내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육적인 사람은 몸을 버리고 낭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하다고 핑게대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몸을 바르게 쓰지 않을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내놓아 극도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의 사랑은 이기적인 안일과 나태함을 부인하도록 우리를 강권하지 않는가!

야곱은 요셉이 자기 뜻을 준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 하나님을 경배하며 머리를 숙였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창세기 46:4에 기록된 약속을 주께서 이루시도 계심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극도의 쇠약함 속에서 하나님께 존귀를 돌리기 위해서 침대 머리맡을 향하여 머리를 숙인다.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외심과 믿음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그는 그러한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땅에서 나그네 된 자기의 조건을 증거하였고, 이 세상이 싫어 얼른 세상을 떠나고 싶은 의지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과, 이제 가까이 보이는 영원한 복락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했다.♥

성경에서, 야곱에 대하여 성령께서 하신 마지막 말(히 11:21)이 "경배"하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으니 그 얼마나 복된가!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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