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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주권 56]

En Hakkore 2024. 5. 22. 15:57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진정한 자유의 본성 2(장문)

앞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만 있는 게 아니다. 자연인의 도덕적, 영적 무능력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아주 많다. 여호수아 24장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또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문제가 있다. 죄인이 할 능력이 없는 일을 못했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는가?

용어에 대한 세밀한 정의가 필요하다. '능력이 없다'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죄인의 무능력을 말할 때, 이것은 인간이 그리스도께 나오길 갈망하더라도 그 갈망을 실행에 옮길 필수적인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절대 이런 뜻이 아니다. 죄인의 무능력이나 능력 부재는 그리스도께 나오려는 의지의 부재 때문이며, 이러한 의지의 부재는 부패한 마음의 열매이다. 자연적 무능력과 도덕적, 영적 무능력을 구분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성경은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왕상 14:4)고 말하며,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욘 1:13)고 말한다.

두 구절에서 '못하더라'와 '못한지라'는 말은 모두 자연적 무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4)라는 말씀에서 '없었더라'는 말은 도덕적 무능력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이들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육체적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고 말하는가? 같은 절에 그 대답이 나온다.

이들이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2장 14절을 보자. 한 무리의 악인들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cannot, 못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도 도덕적 무능력이다. 왜 이들이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못했다)" 라고 말하는가? 이들의 눈에 음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8절도 마찬가지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은 영적 무능력이다. 왜 자연인(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엡 4:18)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 마음이 싫어하는 바를 선택하지 못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 12:3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이런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도 도덕적, 영적 무능력이다. 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죄인이 그리스도께 올 수 없는가? 그의 악한 마음이 죄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경이 자연적 무능력과 도덕적, 영적 무능력을 구분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맹인 바디메오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돌이키지 않으려고]"(마 13:15) 눈을 감은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자연인은 만약 그리스도께 오고 싶으면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만약' 이라는 단어가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대답한다. 죄인의 무능력은 진정으로 갈망하고 실제로 행할 도덕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제시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죄인은 자연적 능력은 있으나 도덕적, 영적 무능력 때문에 고통당하며, 이 사실은 죄인의 책임을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했다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파기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 반대다.

죄인의 도덕적 무능력은 죄인의 죄책을 증가시킬 뿐이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이것을 쉽게 증명해 준다. 요셉의 형들은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이 요셉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도덕적 무능력이 조금이라도 핑게거리가 되는가? 분명히 아니다. 이들의 죄가 컸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 무능력 때문이었다.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던[못했던]"(벧후 2:14)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들은 범죄하길 그치지 못했는가? 이들의 눈에 음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들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들이 범죄하길 그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이들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죄가 더 커질 뿐이었다.

어떤 죄인이 여기에 반대하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는 부패한 마음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 저의 도덕적, 영적 무능력은 저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겠다.

"부패한 성향에 자유롭게 빠지는 - 탐닉하는 - 자는 누구든지 책임과 과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불같이 화를 내고나서, 부모에게서 이런 기질을 물려받아서 그렇다며 나의 행동을 정당화한다면, 사람들이 혹시 나를 불쌍히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책임을 면해주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이런 경우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위에 제시된 경우에 적용되는 이러한 원리에 딴지를 거는가?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눅 19:22)라는 말씀이 여기에 적용되는 게 분명하다. 이게 제 본성이니까요."라며 자신을 변호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히 이런 놈은 교도소에 보내야 한다는 결론이 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죄악된 마음의 성향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분명히 이런 자가 가야할 곳은 불못이다. 살인자가 자신은 그 사람을 너무 증오해서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이런 한변이 오히려 그의 죄를 무겁게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죄를 너무 사랑해 하나님과 원수된 자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 책임이 있다. 이것은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이런 의식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내재한다. 성경뿐 아니라 자연적인 양심도 이것을 가르친다. 인간의 책임은 자연적인 인간의 능력에 기초한다. 이제 능력이란 말이 함축하는 의미를 밝혀야 한다. 구체적인 예가 추상적인 논증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100달러를 빚졌는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쓸 돈은 많은데도 정작 빚 갚을 돈은 없어 갚지 못하겠다고 항변한다고 해보자.

내가 뭐라고 말하겠는가? 나는 그에게 정직한 마음이 없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나의 정직하지 못한 채무자의 어느 친구가, 내가 정직한 마음이 빚을 갚을 능력을 낳는다고 했다고 말한다면, 부당한 평가이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채무자의 능력은 내게 수표를 써 주는 데 있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은 정직한 마음이다. 그는 수표를 써 줄 힘이 있고, 그러므로 그렇게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 정직한 마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똑같은 방식으로 죄인은 도덕적, 영적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자연적 능력은 있다. 자연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책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동일한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은 동일한 마음으로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한다.

인간의 죄책은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백치와 유아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 이들은 자연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리 분별력이 있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양심이 있으며, 영원의 문제를 가늠할 능력이 있는 정상인은 책임 있는 존재이다.

그는 바로 이런 능력들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해야"(롬 14:12, "자신들에 관해 직접 설명하리라" - 한글킹제임스)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앞에서 말한 죄인의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영적 능력 간의 구별이 가장 중요하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능력은 있으나 도덕적, 영적 능력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 도덕적, 영적 능력이 없다고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책임은 자연적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다시 설명해 보자.

여기 도둑질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백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나 부모가 모두 범죄자이다. 정의로은 재판관이라면 첫 번째 도둑에게는 형을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재판관이라면, 두 번째 도둑에게 형을 선고할 것이다.

왜냐하면 범죄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부패한 도덕적 본성을 가졌더라도 그가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면, 부패한 도덕적 본성을 가졌다고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은 사리분별력(합리성)과 더불어 양심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죄인이 책임 있는 피조물인 까닭은 이러한 자연적 능력들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죄인의 죄책이 확정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 순종의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시는 것과 그분의 자비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앞에서 말한 것 외에,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자기 관리를 잃지 않으셨다.

피조물이 연약하다고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술취한 종도 여전히 종이다. 종이 타락하면 주인이 권리를 잃는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우리와 계약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아담은 우리의 언약의 머리요 대표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지만, 우리는 첫 조상의 타락을 통해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능력이 사라졌으나 하나님은 지금도 순종과 섬김을 당연한 권리로 정당하게 요구하실 수 있다.♡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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