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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주권 33]

En Hakkore 2024. 5. 19. 07:53

유기(遺棄)와 하나님의 주권 6

이제 19절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동일한 반론을 조금 다른 형태로 다시 제기하는데 그것은 그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여기서 존의되는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주권적인 방법)과 관련된 게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가 17~18절에 관해 했던 말이 옳음을 확인해 준다. 즉 이것은 단순히 형벌로서의 완악하게 하심 - 다시 말해, 먼저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완악하게 하심 - 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적으로, 완악하게 하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타락하고 죄악된 피조물을 완악하게 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다. 바울이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사도 바울은 반론제기가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의 불경을 꾸짖는다.

바울은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단지 인간이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반문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하며 불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 더 상기시킨다. 그는 '지음을 받은 물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지으신 분에게 항의하여 일어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이 구절을 마무리하기 전에  꼭 지적해야 할 게 있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는 논의되는 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맥에 비춰볼 때 '이같이'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앞 구절들과 연결된다.

따라서 에서의 예와 연결하면 "어찌 그저 '완악하게 하시려고' 나를 지으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이 물음이 다른 의미일 수 있겠는가? 이 구절 전체의 목적은 하나님이 다음 두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실 때 나타나는 그분의 주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게 중요하다.

1. 그분이 사랑하는 자들 - 귀하게 쓸 그릇과 긍휼의 그릇
2. 그분이 '미워하시며' '완악하게 하시는' 자들 - 친히 쓸 그릇과 진노의 그릇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료"(롬 9:21-23).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제기된 반론에 답한다. 먼저 그는 이렇게 묻는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여기서 '권한'(power)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와 22절에서 '능력'(power)으로 번역된 단어는 다르다.

22절에서 '능력'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힘(might)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21절에서 '권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토기장이의 권리나 절대적 특권을 가리킨다. 사실 똑같은 헬라어 단어가 요한복음 1장 12절에도 나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power)를 주셨으니." 잘 알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나 특권을 의미한다. 개정역은 요한복음1장 12절과 로마서 9장 21절 두 곳 모두에서 'right'(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절) 앞 절에 비춰볼 때, 여기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 앞 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그런 다음, 자신이 곧 사용할 은유법으로 묻는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다른 것들보다 덜 귀한 목적에 사용될 그릇들을 만드는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그릇이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계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절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덜 귀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천히 쓰도록 만들어진 그릇들을 말한다. 물론 유기된 자들의 멸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것이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완전히 입증될 것이다. 어떻게 입증되는지는 22절에서 살펴보겠다.

이 절과 앞의 두 절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다음 절로 넘어가자.

19절에는 두 질문이 나온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바울은 두 질문에 세 부분으로 나눠서 답한다.

1. 20절에서, 바울은 피조물에게는 창조자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무결하다는데 절대로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틀림없이 옳다.

2. 21절에서, 바울은 창조자에게는 자기 피조물을 자신의 눈에 적합한대로 배치할 권한이 있다고 선언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여기서 '권한'(power)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엑소우시아(exousia)인데, 22절에서 '능력'(power)는 두아톤(duaton)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만들 권한이  없느냐"에서 '권한'(power)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도덕적 권리'(moral right)를 의미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순수 실행 능력'(raw power to perform)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이 의도된 의미라면 우리는 19절의 본래 질문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3. 22~23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서로 다르게 대하시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의 진노를 보이시기' 위해서이며, '그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헤서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항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도덕적 권리가 있다. 그분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권리를 행사하시는가? 그렇다. 13절과 17절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바로]를 세웠으니"(17절).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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