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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33] 고난의 말씀 5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33] 고난의 말씀 5

En Hakkore 2024. 5. 16. 12:47

고난의 말씀(The Word of Suffering)

6. 우주적인 필요를 표현한다

입으로 말하든 하지 않든 간에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은 "목마르다"라고 외친다. 왜 부를 얻고자 애타게 갈망하는가? 왜 세상의 영예와 갈채를 열망하는가? 왜 지치지도 않고 이것저것 쫓아다니면서 재미를 찾아 무섭게 돌진하는가?

왜 과학적인 의문들을 품고, 철학을 연구하며, 고전들을 섭렵하고, 끝없는 실험들을 하면서 지혜를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가? 왜 신기한 것들에 미친 듯이 열광하는가? 왜 그럴까? 영혼에 뼈아픈 공허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만장자나 거지나 마찬가지이다. 백만장자의 부는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이것은 전 세계를 들어본 사람이나 고향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는 시골뜨기나 마찬가지이다.

지구 저편 끝에서 이편 끝까지 또 다시 저편 끝까지 여행을 해도 평안의 비법을 하지 못한다,  이 세상이 주는 물탱크에는 지울 수 없는 진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니와"(요
4:13).

이것은 종교를 갖고 있는 남자나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종교란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를 말한다. 넌덜머리나게 종교 행위를 하고도 자신들의 깊은 욕구를 채울 만한 것을 찾지 못하여 헤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복음주의 종파의 일원일 수도 있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할 수도 있다.

목회자의 생활을 위해 재물을 기부하기도 하고, 이따금 성경을 읽으며, 때때로 기도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도문"을 이용하여 매일 밤 기도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솔직하다면 여전히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칠 것이다.

이 목마름은 영적인 갈증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마시는 것으로 해갈할 수 없다. 그들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한다(시 42:2).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그분만이 우리를 만족시키실 수 있다.♡

주 예수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14).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갈 하실 수 있다. 그만이 우리 마음의 절박한 용구를 채우실 수 있다. 그분만이 세상이 알지 못하고 줄 수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는 평안을 나누어 주실 수 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양심에 말하고자 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 땅의 것은 당신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발견했는가? 당신의 영혼은 "목마르다"고 외치는가? 그렇다면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

교리도 어떤 종교의 형태도 아니라 바로 한 인격이시다. 살아계시고 신성을 가진 인격이시다. 그는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이 반가운 초대에 귀를 기울이라.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그에게 나아오라. 그가 받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라. 그리고 노래하라.

약하고 지치고 슬픈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나아갔더니,
거기에 내 쉴 곳 있네,
그는 나의 기쁨.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지체하지 말라. 당신은 지금 "목마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가 찾고 있는 자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구원받지 못한 독자는 구주를 거절하지 말라.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영원히 "목마르다"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이 저주 받은 자의 한탄이다. 불못에 있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으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세 시간 동안 하나님의 진노로 고난을 받으시면서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셨다면 그것을 영원히 견디어야 하는 이들의 상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수백 년이 지나도 수천 년이 더 남았다. 지옥에는 목을 축일 만한 한 방울의 물도 허락되지 않는 영원한 목마름이 있다.

부자의 무서운 말을 기억하라.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단 몇 시간 동안이라도 극한 갈증을 참기 어렵다면, 이 세상의 갈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원한 갈증이 결코 해갈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라!

죄를 범한 창조물을 이렇게 다룬다고 해서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말하지 말라. 죄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가되었을 때 아들에게 내리신 것을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자는 지옥에서도 가장 뜨거운 곳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그를 당신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 당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당신의 주님으로 순종하라.

                        "내가 목마르다."

7. 변치 않은 원리를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여전히 목마르시다는 것은 실제적이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 자신의 사랑과 헌신 때문에 목마르시다. 그는 피 값으로 산 백성들과 교제하길 갈망하신다. 이것이 은혜의 위대한 신비이다. 구속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다!

나는 어떻게 그의 사랑을 누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족하신 그분이 나의 사랑을 누리셔야 한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그와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이 내 영혼에 얼마나 복된 일인가 배웠다. 그러나 내가 주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이 그리스도께도 복된 일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목마르다."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다. 놀랍기만 한 생각이다! 여행과 더위로 "곤하신" 주님께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우물가에 온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물은 드시지 않았다는 것을 요한복음 4장에서 발견한 적이 있는가?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과 믿음에서 그는 마음을 해갈하는 것을 발견하셨다! 사랑은 반응이 있고 사랑으로 되돌아와야만 비로소 충족된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핵심이 이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종종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만,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은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께서 교제를 원하시는 것을 그리고 있다.

성경에서 주의 만찬이 구주와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별한 교제 시간이듯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먹고"는 항상 교제의 상징이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중으로 "먹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하여 보라.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와 함께 먹고 교제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우리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그도 우리와 함께 '먹는다'. 그는 우리와의 교제 속에서 그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는 것, 그의 갈증을 풀어 주는 것을 발견하신다.

바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목마르시다."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 목마르시다. 그를 만족시킬만한 것을 드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부르심을 답하라. "너는 나를 마음에 인(印) 같이 품고"(아 8:6).♡

Arthur W. P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