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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11] 구원의 말씀 5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11] 구원의 말씀 5

En Hakkore 2024. 5. 14. 11:35

구원의 말씀(The Word of Salvation)

3. 회개와 믿음의 의미를 보여 준다(장문)

회개는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의미와 범위 안에는 죄에 대한 생각의 변화와 죄를 슬퍼하고 버리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회개는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실제로 회개는 우리의 상실된 상태를 깨닫고, 타락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평가하고, 잃어버린 신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지적인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능동적 활동이다. 바로 이것이 강도의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이다.

첫째, 그는 다른 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눅 23:40) 라고 말한다. 조금전만 하더라도 그는 구주를 비난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눅 23:41), 그는 자신의 죄와 처벌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다. 변명도 하지 않고 형을 줄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범죄자이며 자기에게 내려진 죽음을 죄의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세를 가진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 죄를 속직히 고백한 적이 있는가? 자기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의 수단들을 심판한 적이 있는가? 죽음이 "응당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죄를 변명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인들 - 자백하는 죄인,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죄인, 잃어버렸고 끝장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이 강도의 "하나님을 향한 회개"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었다. 그의 믿음을 생각해 보면, 머리로 아는 지적인 믿음이었다는 것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거부할 수 없는 승리의 은혜를 살펴보았는데, 이것이 이 강도의 회심에서 나타났다.

이제 고려할 가치가 있는 진실의 또 다른 면을 보자. 이전에 말했던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보충해 주고 보완해 주는 이면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영혼을 구원받도록 선택하셨다면 그가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끌어낸 잘못된 결론이다.

성경은 목적을 예정하신 하나님이 방법도 예정하신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강도의 구원을 예정하셨던 하나님은 그에게 믿는 믿음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셨다. 이것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과 그 외 성경 말씀들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것이 바로 강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믿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다.

십자가 위의 패에는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 빌라도는 그것을 조롱거리로 붙여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였고, 빌라도가 그 패를 붙이라고 명령한 후에 하나님은 빌라도가 그것을 바꾸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패는 예루살렘 거리를 가로질러 십자가 처형장까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달려 있었고, 그것을 읽은 강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졌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이해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그 때에" 라고 말했다. 믿음은 항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전에 먼저 그가 실제로 그리스도이심을 주님 앞에서 고백해야만 한다. 종종 머리로 믿는 믿음과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구분하는데, 실제적이고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적절하다.

때로 머리로 아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마음으로 느끼기 전에 먼저 머리로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주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구원받기 이전에 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단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은 머리로 아는 믿음이 없기에 마음으로 느끼는 믿음도 없다. 물론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없다면 머리로만 아는 믿음으로는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어떻게 들어보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까?

사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서 믿을 수는 없다. 죽어가는 강도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 날 전에 그리스도를 본 적은 분명히 없었겠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그 패를 보았고, 성령께서 이를 그의 믿음의 기반으로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지적인 믿음이었다. 그에게 보인 패의 증거를 믿은 지적인 믿음이 먼저였고,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구주로 신뢰한 것이 마음의 믿음이었다. 이 죽어가는 강도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받는 마음의 믿음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보자. 주 예수를 아는 믿음은 있지만 죄악 가운데서 헤매는 사람이 있다. 역사적인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 속의 나폴레옹을 알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당신도 구주에 대해, 그 완벽한 생애, 희생적인 죽음, 승리의 부활, 영광스러운 승천, 약속하신 재림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끝난 게 아니다. 복음의 믿음은 신뢰하는 믿음이다. 구원의 믿음은 올바른 의견이나 일련의 논리, 그 이상의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모든 이성을 초월한다. 이 죽어가는 강도를 보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주목하신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이며, 스스로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범죄자이고, 몇 분 전까지만 해고 예수님을 욕했던 자이다!

구주께서 그에게 신경 쓰시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가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서 천당으로 옮겨지도록 기대하는 것이 제 정신인가? 머리는 계산을 하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의 간청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는 손과 발을 사용하지 않았다.(이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는 마음과 입을 사용하였다. 마음과 입은 자유롭게 믿고 고백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또한 그의 소박한 믿음을 주목해 볼 수 있다. 그는 수줍게 기도했다. "주여, "나를 영광되게 하소서"였다. 그러나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충분하고도 적절했다.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하소서"는 이 모든 것을 내포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의 모든 유익을 얻는 것을 내포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의 모든 유익을 얻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더구나, 이 말을 언급한 사람이 상황과 너무나 잘 맞았다.

그는 사회에서 내쳐진 자였다. 누가 그를 생각이나 할 것인가! 대중들은 다시는 그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집안의 수치거리였던 그를 잊어버리게 되어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감히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청드릴 수 있는 한 분이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용기 있는 믿음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첫눈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용기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린 이에게 모든 눈들이 쏠려 있고, 폭도들의 악의에 찬 조롱거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군중들 여기저기서 구주를 향한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누가는 이렇게 말한다. "군병들도 희롱하면서"(눅 23:36). 그러므로 왜 강도들도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비아냥거릴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명히 미소를 내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

참회한 강도는 계속 그리스도에게 빈정대는 대신 십자가 주위에 모여선 구경꾼들이 듣는 앞에서 드러내 놓고 자신의 동료를 꾸짖고 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유대 민족 전체를 책망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왕 되심을 고백했다. 단 한 마디 말로 동료뿐만 아니라 군중 모두의 눈 밖에 나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용기를 이야기하지만, 그날 죽어가는 강도가 보여 주었던 용기 앞에서 오늘날의 용기는 무색해진다.♡

Arthur W. Pi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