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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67]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67]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30. 12:31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반대 의견들 9)

십자가를 앞에 두신 우리 주님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분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시 16:8)고 한 분이셨고,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요 8:29)고 단언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고뇌라는 인간, 슬픔을 당해야 할 인간'으로서 일생을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시련과 고난, 역경과 수난이 그의 분깃일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수난은 죄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자신의 죄가 아니라 교회의 죄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실 리가 없다. 하물며 사랑하시는 아들을 악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 불의한 고통을 당하게 하시겠는가? 베들레헴에서 갈보리에 이르기까지 자기 백성의 죄와 형벌을 지시기 위해 자기 백성의 대속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공생애 기간, 혹은 그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부당한 대우와 멸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율법 아래 태어나셨으며"(갈 4:4) 범죄한 이들의 담보물로서 그들이 받을 저주 아래 출생하셨다. 그가 출생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의 정의의 칼은 빼어졌고 그 칼은 집으로 들어갈 줄을 몰랐다.

사도 바울이 당했던 끈질기고도 극심했던 질병에 대해서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고후 11:23-27). 바울의 경우는 욥이나 대속의 그리스도와같이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즉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보복때문에 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고난을 하나님의 보복으로만 생각하는 것으 많은 고난받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극단적인 생각, 즉 모든 고난은 성도를 성결케 하며 성도의 은혜를 성장케 하기 위한 치료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다. 고난의 문제는 여기서 다루어 온 내용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단 하나의 측면, 즉 하나님의 보복적인 측면만을 다루어 왔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의하려 한다면 이는 우리의 논지에서 벗어나는 일이겠으나 몇 가지 특성을 지적해 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고난들이 있다(요 9:2,3).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확신한다.

어떤 고난들은 유전에 의한 것들이다(출 20:5). 아간의 가족은 그 아비의 죄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다(수 7:24,25). 나아만의 문둥병은 게하시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도 옮았다(왕하 5:7). 대부분의 고난은 하나님의 보복으로서 인간이 자기 행위대로 거두는 것들이다.

어떤 고난은 교훈적이며 치료적인 성격을 가진다(고후 4:16,17; 약 1:2,3). 이는 하나님과 좀더 밀접하게 연합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들이다. 또 어떤 고난은 의를 위한 것, 복음을 위한 것, 그리스도를 위한 것들이다(마 5:10,11). 이는 사도들이 경험한 바요, 로 로마제국 시대에 '거룩한 순교자 군단'이 경험한 바요, 사자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바며 교황의 손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찢기우고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당하면서 경험한 바일 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들이 권세를 잡았더라면 오늘날도 다시 되풀이될 고난이다.

교황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는 '항상 동일하다'(semper idem)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義)를 위한 '시련' 혹은 박해(요 16:33; 딤후 3:12)와 우리 죄 때문에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을 명확히 구분해야만 한다.

성도들이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의 참고구절을 잘 깨닫게 되면 이것을 혼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고난을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한 이유는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짓기 위해서나 설교자들에게 '고난'이라는 큰 주제의 개요를 설명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경고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성도가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최상을 상실하고 그 죄 때문에 매를 맞는다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해 온 바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미소가 더 이상 우리 마음에 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서 간절하고도 겸손하게 우리의 죄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며 그 죄를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복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대다수 성도들이 경험해 본 고난은 이 두 가지 고난의 유형 중에서 아마도 그들의 잘못과 명예 때문에 진리를 위해 내리신 징벌의 고난일 것이다. 물론 다른 동기의 고난을 경험한 이들도 많을 줄 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친구들이 냉담해지고 멀어지는 경우에 실수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자기들의 잘못 때문에 혹은 "남의 일을 간섭했기"(벧전 4:15) 때문에 비난을 받고 배척을 박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신실함 때문에 자기는 고난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과 밀접하게 겸손히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명하신 길을 불평없이 걷는 사람은 분명히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특히 자기의 불경건과 죄악으로 인해 정죄받을 공허함 교수들로부터 반대를 당하고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당하게 되는 박해와 고난은 모두가 특권이요 영광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요(벧전 4:13), 그들이 바로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할" 자들이기 때문이다(행 5:41).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이 없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평판을 잃지 않으려고 우리의 본색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