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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21]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21]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En Hakkore 2024. 4. 26. 11:47

제 8 장 주의 일(4)

지금까지 이 말씀을 주제별로만 언급해 왔는데, 이제는 문맥상 의미 가운데 이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55절과 56절에서 사도는 묻고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에 대해 그는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외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57절)고, 여기 동사의 시제를 가만히 살펴보라. 이김을 '주셨다'도 아니고 '주실 것이다'도 아니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이김'이라는 말 역시 주의깊게 생각해야 하는데 이는 죄와 율법에 따른 죽음과 무덤에 대한 이김이다.

이것은 자기 영혼을 완전히 성별해 드린 몇몇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것이다. 분명히, 그 이김은 부활의 아침에 완전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김은 믿음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소망으로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하느냐에 따라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말씀은 바로 그 앞절인 56절에 주신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기쁨에 찬 믿음의 말씀이다. 죄의 결과이며 율법의 징벌인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잠자는 모든 성도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들의 머리로서(20-22절) 그들의 죄를 대신 당하시며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더니 "마지막 아담"(45절)으로서 무덤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이 복된 진리를 믿는 자는 거기에 따르는 영적인 이익들을 누리게 되는데, 그는 그 자신이(볍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깨닫게 되며, 죄가 더 이상 그를 죽이지 못하며 율법이 그를 더 이상 저주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행 13:39절) 의롭다고 칭함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에 그는 사망의 쏘는 것을 면하게 되고, 그에 따라 모든 공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고 면제시키셨기 때문에 사망은 독침을 잃은 말벌처럼 성도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다만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그를 교란시킬 뿐이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죄의 권능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우리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해방되었다. 율법의 모든 저주와 협박이 그분께 가해졌으므로 주님이 누구를 위해 그것을 받으셨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다 그 저주와 협박을 면제받는다.

그러나 좀더 설명하면, 에덴에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율법이 죄인들을 향해 명령권을 가지게 되었고, 죄는 죄인을 다스리고, 죄인을 그 하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결과였다.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보다 자기의 의지대로 사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저주하며,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동시에 부여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죄인을 향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은 율법과 저주에 따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율법은 거룩을 명하지만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그 율법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격노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름더미에 태양이 비취면 더러운 수증기가 진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로 벌하신다. 인간이 선택해서 지은 죄이기 때문에 죄의 권능은 그의 당연한 무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지배권으로부터도 구원해 내셨기 때문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라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바로 이것이 크신 은혜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되게 하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모든 앞의 구절들로부터 특히 56, 57절 말씀으로부터 얻어지는 결론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를 법적으로 구원하시되 율법의 모든 저주와 죄의 지배와 죄책으로부터 그를 구원하셨다.

그러면 이런 축복에 대해 성도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 것인가? 왜냐하면, 그 은혜가 실제적으로 그에게 효용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로마서 6:11의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즉 이 말씀을 믿고 주님의 인격 안에서 자기 자신이 법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여겨야 한다.

둘째로, 로마서 6:12의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내재하는 죄가 당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과거에 행한 모든 것을 면제받았으니 하나님께 복종하고 당신의 타락한 본성에 복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58절을 56,57절과 제대로 연관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58절을 옳게 해석할 수 없다. 58절의 "그러므로"는 로마서 6:12의 "그러므로"와 같이 논리적이고도 필수적인 단어로서 그 뒤의 구절들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게 해 준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즉 너희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법적인 신분에 맞게 실제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와 대구(對句)를 이루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 4:1)는 말씀인데, 여기서는 교리적인 사실이 먼저 나오고 실제적인 의무가 그 뒤에 언급되어 있다. 법적으로 '승리'는 지금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얻은 우리의 칭의가 증명하는 바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 유혹하는 힘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어느 정도라 함은, 죄의 유혹하는 힘이 죄를 미워하고 또 반대하는 우리에게 아직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을 때, 죄는 우리 영혼에서 완전히 근절된다.

우리가 부활할 때 죄의 지난날 흔적은 우리 몸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사도는 위대한 부활진리를 설명하다가 실제적인 적응, 즉 성도들의 새 생활을 강조했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