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실천 69]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69]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22. 11:04

제 3장 위대한 변화

7. 결론(3)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은 중생시에 죄가 '치명타'(death-wound)를 맞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또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고 그 사실을 보장해 주는 어떤 성경구절도 알지 못한다. 로마서 6:6,7이나 갈라디아서 5:24 등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것 정도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의 터 위에 세워져 있을 때에, 우리의 영혼은 죄책과 죄의 정죄로부터 영원히 구속되며, 또한 죄의 법적인 '지배'로부터 영원히 풀려난다. 우리 영혼이 도덕적으로 순결해짐으로써 죄의 권세와 죄를 사랑함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육체의 정욕들을 대적하여 저항한다.

죄는 이제 영혼의 제기능들에 대한 지배권을 박탈당했으며, 따라서 충성스런 복종을 더 이상 죄에게 양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꼐서 그놈의 발악을 어느 정도 제어하셨지만 그놈의 최후 발악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때떄로 우리를 슬픔에 잠기게 한다.

전에는 '마음의 변화'란 표현이 '육신의 변화'와 혼동되었기 때문에 그 표현사용을 꺼렸다. 중생시에 마음은 변화되었으나 '육신'은, 비록 영혼에 대한 막강한 통치는 중단되었으나 거룩해지거나 신령해지지 않았다. 내주하는 죄는 근절되지 않았으나 그것의 지배권은 사라졌으며,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일으킬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육신'의 기호와 경향은 거듭나기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다만 은혜에 의해 '억제되며' 내적 평안에 비례하여 조금씩 변모한다. 그리고 때론 그것들이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여서 몹시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단이 그리스도를 '잠시동안' 떠난 것같이(눅 4:13), 그것들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머지 않아 기습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죄를 대항하며, '성결의 영', 혹은 원리는 육신과 투쟁하며 죄로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생명이 죽음과 반대인 것처럼 순결한 부정과, 영성은 육체성과 반대를 이룬다. 따라서 우리 영혼은 은혜와 죄가 각각 주재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것을 경험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두 개의 구분되는 행동의 원동력이 있다면 - 하나는 죄를 충동시키고 또 하나는 선을 충동하는  그것들의 명칭을 '본질'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원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리스도인 안에 두 개의 마음, 또는 두 개의 의지가 있다는 생각은 그가 두 개의 영혼을 가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사실이 아니다.

만일 인간이 두 개의 영혼을 소유한 존재라면 도덕적 책임을 져야할 대상이 두 개인 셈이 되며, 이런 생각은 개인의 신분을 파괴하게 되므로 우리를 끝없는 사고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 3:12). 만일 성도가 두 개의 마음 - 하나는 믿지 아니하는 마음, 또 하나는 믿지 못하게 하는 마음 -을 소유하였다면 위의 말씀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마음을 가진 한 인격이며 한 개체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부패성의 활동에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며,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불신하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와 더불어 투쟁해야 한다.

"내 마음(내 전 영혼)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시 119:36). 이 구절도 또한 그리스도인이 두 개의 '마음' - 즉 하나는 육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을 가졌다는 생각과 또 그 둘의 동의어는 '육신'과 '영'이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드러내주는 구절이다.

하나님께 '내 육신'(내주하는 죄)이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해달라는 정반대를 이루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성령'(내주하는 은혜)을 탐욕으로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속사람으로 간주한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나를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기를 몹시 바라지만 자신 안에 불순종의 경향이 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사상과 감정의 습관적인 경향이 세상으로가 아니라 하늘로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의 말씀 속에서 제게 명령하신 경건을 이루려는 저의 노력이 당신의 성령의 권능의 역사에 의해 효과가 있게 하옵소서."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