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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52]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52]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20. 10:46

5. 하나님의 제작품(8)

요한일서 3:14이 취급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소유한 독특한 사랑이다. 구속주와 구속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거듭난 영혼들에게 전달된 영적 생명에 일치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 내부에 세워놓으신 거룩한 상태의 열매이다.

이 사랑은 단지 감정과 애정으로만 구성되는 자연계의 '사랑'과 엄격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중생인들이 '형제를 사랑함'은 그들이 상냥하고 다정하기 때문이 아니며, 또 그들이 그들의 모임에 따뜻함을 제공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형제를 사랑함'은 그 형제들이 현명하고 정통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경건함(godlinces) 때문이다.

경건함이 명백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들을 사랑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 형제들의 교단에 상관없이 경건한 자 모두를 사랑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 모두를 사랑하고, 그 형제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을 사랑한다.

중생인들의 사랑은 대상들의 선을 추구하는 영적이고, 무목적적이며, 신실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형제들의 시련과 고통을 볼 때 동정하며 또 그 형제들을 그들의 기도시간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해가며 필요하다면 권면과 책망도 불사하는 그런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의하여 위대한 변화를 묘사하는 일에 사요왼 언어들, 즉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이다. 이것과는 그 의의가 약간 다르긴 해도, 요한복음 5:24에서 우리 주님에 의해 사용된 유사한 표현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영적인 귀로써( 또 나 보내신 이를(구원신앙으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그가 듣고 믿었다는 사실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란 말은 법정적인 면에 대한 진술이다.

따라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괜찮다면 "영생을 얻었고"를 그 선행구절에 덧붙일 수 있다)란 말도 법적(judical)인 것이다. 자기에게 주권적으로 분여된 '영생'을 소유한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은 정죄의 자리로부터 영원히 빠져나왔으며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의 개인적인 순종과 그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義)로 인하여 '생명'의 수납자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는 권면을 듣게 된다.

그러나 요한일서 3:14은 사건의 법정적인 면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체험하는 경험적인 면을 취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과 관련된 상대적인 변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이다. 그들은 그들이 출생한 그 두려운 상태로부터 '옮겨졌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엡 4:18) 상태, 즉 중생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들은 죄와 사망의 무덤으로부터 초자연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생명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그들은 중생의 결과 하나님의 존전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본래 영적 사망에 영원히 버러져 있었으나 "새로운 생명을 따라 사는" 영적 새 세계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함'은 은혜의 이적이 그들 내부에 발생하였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들은 이 표식으로서 그들의 영적 부활을 명시한다.

그들은 그리스돜께 사랑받는 자들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진 자들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닌 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시하려고 진력하는 자들의 유익을 간절히 추구한다. 요한일서 3:14은 일종의 권면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한 실제적인 진술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