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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51]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51]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9. 11:47

5. 하나님의 제작품(7)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사단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비난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정의한 점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요일 2:16).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베드로후서 1:4은 그리스도인을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한 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롯이 소돔성으로부터 탈출할 때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손의 개입에 의하여 피한 것이다. 전능자의 간단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손을 이끄시는 충만한 은혜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거룩함이나 이미 살펴 본 구절이 표현하듯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의하여 피한 것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성품"에 의하여 내적 부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

따라서 우리가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이해하려면 이 구절에 보이는 신적 순서를 면밀히 검토해야만 한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었을 때, 은혜와 성결의 본질이 영혼에 전달되었을 때, 그 성결의 본질(많은 경우 '새로운 성품' 이라고 표현된다)은 내주하는 죄나 '썩어질 것'(corruption)의 역사에 반대하여 생명력있게 작용한다.

육체의 소욕이 영을 거스릴 뿐만 아니라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갈 5:17). "신의 성품"은 우리 안에 '경건'을 일으켰으며, 그 성품의 수납자의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성결을 추구토록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게 한다.

여기에 베드로후서 1:3,4에 묘사된 내용과 베드로후서 2:20에 묘사된 내용과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후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됨에 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다! 2:20의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다"란 말은 단지 외적인 오염과 추잡한 죄악에 대한 당대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22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

그리스도인이 자기 안에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어찌하였는지를 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비평기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런데 먼저, 은혜의 이적이 발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후에 그것의 결과와 열매를 보고야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 명백히 함축되어 있다(이 서신의 다른 부분, 2:3; 4:13)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우리는 성도가 소생하는 순간에 중생을 의식한다고 명백히 암시하거나 분명히 선언하는 단 하나의 구절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자기가 죄를 최초로 확신했던 때와 자기의 버려진 상태를 인지했을 때, 그리고 속죄의 보혈을 의뢰했던 때와 자기의 버려진 상태를 인지했을 때, 그리고 속죄의 보혈을 의뢰했던 때와 마음의 짐이 멀리 굴러가버렸던 때의 상황을 상술할 수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필자를 포함해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도 영적으로 죽은 그들의 영혼에 생명이 분여된 때를 알지 못한다. 이 생명은 그들이 전에는 결코 몰랐던 방식으로 호흡하게 하고, 보고, 느끼고, 듣고, 그리고 행동하도록 그들을 자극하였다.

전에는 결코 없었던 생명의 어떤 기능이나 활동이 나타난면 생명이 현존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죄로 죽어있는 사람은 구원에 이르도록 회개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다.

요한의 첫번째 서신이 기록된 의도 중의 하나는, 영원한 생명의 다양한 증거들과 현현들을 묘사함으로써 중생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분여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5:13). 3:14에 상술된 비평표준은 '형제를 사랑함'이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형상을 중시하는 그의 자녀들도 경멸한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나내 아래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존경하게 된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증거가 더욱 확실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을 더욱 더 사랑한다. 그 '사랑'은 자연적인 감정보다 우월한 성질이며, 또한 거룩의 본질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어떤 단체에 대한 열심이나 정당 정신(party spirit), 또는 우리와 비슷한 감정과 기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 전체에게로 향하는 신적이고 영적이고 거룩한 사랑이다. 그것은 이 형제나 저 형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전체를 포용하는 사랑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