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실천 36]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36]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8. 17:50

3. 위대한 변화(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 위에 건립된 유대교와 그들의 신체에 할례의 언약표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유대교의 특권들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유대교는 그리스도와 영적 관계를 맺은 사람들 위에 건립된 기독교로 대치되었고, 그 기독교의 특권들은 성령의 내주, 즉 새 언약의 표식과 인침을 경험한 사람들이 즐긴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은 이제 보다 고상한 방식으로 인정받고 또 존경받으신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야로 나타나셨고, 그를 믿은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셨다(눅 24:21; 요 1:41,45). 따라서 그는 그의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이것을 부활하신 후에 마태복음 28:19에서 하신 말씀과 대조시켜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메시야로 인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력들 위에 뛰어나신 존귀한 분으로 경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할례의 수종자이셨으니(was), 이제는(now)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하늘의)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시다(히 8:1,2). 17절에서 사도는 15절의 진술로부터 더욱 발전된 결론을 끄집어 낸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렇다. '누구든지'이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다. '새로운 치조물'의 의의를 탐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초두어를 신중하게 고려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있고 없음에 따라 그 문장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is)"라는것은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지만, '그런즉'(there)이란 말은 선행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추출된 하나의 결론이다. 우리가 이 구절에 대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이 구절이 중생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 구절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한 어떤 사람은 중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런즉' 이란 말은 - 그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났는지 혹은 아니든지 간에 - 전혀 불필요한 말이 된다. 그리고 어떤 논리나 추론도 이 사실을 변경시킬 수 없다.

문맥상 중생을 추론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사도가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문제는 성령의 은사와 역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법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바울 사도가 17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리시도인의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부터 산출된 법적 결과(the legal effects)이다.

13,14절에서 그리스도는 첫째, 죽으심에 있어서, 둘째, 부활하심에 있어서의 교회의 언약적 머리로서 설명된다. 사실에 대한 그 교리적 진술로부터 두 개의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부정적인 면으로(16절), 그리스도께서 대표하셔서 돌아가신 그 사람들은 그들의 옛 신분 내지는 자연상태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둘째, 적극적인 면으로(17절), 그리스도께서 대표하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고, 새로운 영적 신분으로 안내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언약의 머리로서 활동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아담의 옛 피조물의 머리였던 것처럼)로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만약에 내가 언약에 의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다면 나는 합법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것이다." 로마서 8:1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와 법적으로 연합한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와 법적으로 연합한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근본(the Beginning)이시며(계 3:14 참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the Firstborn)이시다(골 1:18)."

법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골 3:1) 문맥과 초두어 '그런즉'이 우리가 고린도후서 5:17을 중생할 때에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를 묘사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 구절의 내용 자체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금한다.

은혜의 이적(a miracle of grace)이 그것에 복종하는 사람 내부에 가장 복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진정 사실이지만, 여기 사용된 표현은 은혜의 이적의 변화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그의 성격과 행동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the fresh)가 아닌가? 이것은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실 때 옛 본성이 '사라지지'않는다는 것도 논쟁할 필요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중생이 새 생명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것 또한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중생할 때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몸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17절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어떤 국면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화(glorification)일 것이다. 왜냐하면 17절의 언어들이 중생을 표현하는 단어들로서는 너무나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