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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32]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32]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8. 17:47

2. 시대적인 변화(2)

만일 우리가 고린도 교인들의 정황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려 한다면 고린도 서신들의 기록을 유발시킨 어떤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그린도를 떠나자마자(행 18장)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성도들을 공격하여 사도 바울의 영향력을 붕괴시키고 그의 사역에 애해 불신을 조장시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신자들은 피차 논쟁을 벌이는 반대 집단들로 분열되었고, 육신을 따라 행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전 1:11,12).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방인 신자들이았을 것이고,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하면서 이방인들은 주장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혈연관계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바도 없이 유대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복음의 원수들은 고린도 회중 속에 불화의 씨앗을 파종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인종적 편견을 부각시킴으로써 질투와 증오를 유발시켰으며,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 간의 해묵은 원한을 재개시켰다.

그 거짓 교사들은 성전 권위자들에 의하여 발행된 "천거서"(고후 3:1)를 소지하고 고린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히브리인"(고후 11:22)이었고, "그리스도의 일군" 즉, 메시야의 일군으로 자처하였으나(11:23) 실상은 "거짓 사도며 거짓 일군". 즉 사단의 일군이었다(11:13-15).

만일 할례를 받고 모세 종교의 개종자가 되지 않으면 언약의 축복과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은 이방인 성도들의 유대화를 시도하였다. 사도가 그들에게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라고 써 보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진정 놀란 만란 일이다. 왜냐하면 할례를 제정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창 17:10), 또한 그것은 수 세기 동안 독특한 특권으로 상속되었기 때문이다(출 12:48). 주님 예수 급분께서도 할례를 받으셨다(눅 2:21).

그러나 이제 할례는 '아무것' - 필요없고 무가치한 - 도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이 지상의 하나님의 왕국 안에 섭리적으로 일어난 위대한 변화 때문이다. 유대교는 무능력해졌고 과거사가 되었다. 새롭고 보다 나은 어떤 것이 그것의 자리를 대치해 버렸다.

그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고 명백히 부산하였다. 그들은(행 1:21,22에 기록된 것에 근거하여)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육체로 계시는 동안(그 11명처럼) 그와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그의 사도성의 신적 권위를 변호하는 글을 성도들에게 쓰도록 하였다(고전 9:1-3). 첫번째 서신이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1장과 2장에서 명백하지만, 그 서신은 '거짓 사도들'을 침묵시키지 못했고 또 그들이 흔들어 놓았단 선도들의 신앙을 완전히 견고케 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고린도이들에게 두번째 서신을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한편으론 회중들 다수가 바울에게 따뜻한 애정을 표명했지만(1:14; 7:7),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원수들의 용감성과 영향력은 중대해 갔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거부하라는 그들의 거짓된 지시와 단호한 노력들은(10:2; 11:2-7, 12-15) 사도 바울의 분노를 일으켰다.

고린도교회의 서로 대립되는 이 두 부류의 구성원들은 두번째 서신에 나타난 한 주제로부터 다른 주제로의 급격한 변화와 괄목한 언어의 다양성을 설명해 주는 일에 봉사한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는 비방자들의 반대의 당치 않음과 무가치함을 전시하는 일과 그의 개심자들의 신앙을 부동의 기반 위에 두었다고 말하는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는 그와 그의 동료들을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능력있는(훌륭한) 일군"으로 삼으셨다고 단언한다(6절).

거기서 바울은 뒤에 따라나오는 모든 것들의 으뜸음을 두드렸다. 왜냐하면 3장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대조점들을 시리즈로 열거하면서 전자에 비한 후자의 측정할 수 없는 우월성을 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괴롭히고 힜는 거짓 교사들이 딛고 있는 지반을 께끗하게 제저해 버렸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인 3년 반 동안 바울이 주님과 동행했거나 동행하지 않았거나 간에, 그리고 그의 개심자들이 할례를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간에, 옛 질서, 즉 유대교는 '멀리 사라졌다!'는 것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7절) 태양이 절정의 광휘로 빛나고 있는데 별이 없다고 불평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늘로부터 임한 신령한 지혜로, 바울은 유대교를 능가하는 기독교의 다양한 국면들을 아름답게 엮어서 자기 변호의 직물을 짜내었다. 하나는 '돌비' 위에 기록된 것으로 의식법이요, 다른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육의 심비'에 기록된 견고하고 생명력 있는 것이다(3절).

하나는 "죽이는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주는 영"이다(6절). 이런 표현들은 두 언약의 주도적인 특질들을 전시하여 준다(롬 7:6 참고). 유대교는 그것이 외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의문'(the letter)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그것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나 기질은 제공하지 않으면서 신적 의무의 율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내적이며 능력을 가지고 있다(롬 1:16 참고).

"하니는 외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이다. 하나는 외적인 교훈이나 다른 하나는 내적인 능력이다. 어떤 면에서는 율법은 돌 위에 기록되었고, 다른 것은 마음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는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영이다."(챨스 핫지)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