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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77] 사중(四重)구원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77] 사중(四重)구원

En Hakkore 2024. 4. 15. 11:00

죄의 실존으로부터의 구원 1

우리는 이제 미래에만 관련된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죄는 언젠가는 신자의 존재으로부터 완전한 일소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아무 흠과 티가 없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실 현재에 있어서도 이것은 신자의 율법적인 신분이다. 하지만 그의 현, 상태, 혹은 체험 속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바라보실 때 그는 그의 후원자의 모든 탁월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아직 자신 안에 있는 대로 보실 때 (그리고 신자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보아 알 수 있는데) 그는 타락이 자신 안에 이루어 놓은 모든 파멸을 보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제일 좋은 포도주를 남겨 놓으시기 때문이다. 현실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주님께서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맛보고 있다.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가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미래에 있게 될 것으로 제시하는 성구들은 모두 우리의 죄의 내재로부터의 최종적인 구원에 관심을 둔다. 바울이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롬 13:11)고 말할 때 그는 이것을 언급하였다. 즉 이것은 죄의 쾌락, 혹은 죄의 형벌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 그 자체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그렇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구세주' 이시다. 왜냐하면 은혜로 선택된 자가 모두 완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바로 그가 돌아오실 때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도가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라고 선포할 때, 그는 신자의 구원의 장엄한 극치, 즉 그가 죄의 실존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될 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죄의 쾌락으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심에 의해,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갈 2:20)으로써 성취된다.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견디어 내신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에 의해 확보되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보내시는 성령(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이라고 불리운다.♡ 롬 8:9; 갈 4:6; 계 3:1 참조)의 은혜로운 사역에 의해 얻어진다. 죄의 실존으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취될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다시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3:2)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원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시는 일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즉 그의 창조주의 도덕적인 완전함을 반영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 인간은 원래의 영광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그 타락으로 인하여 그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모양은 훼손되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 안에서 그 형상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첫번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훨씬 고귀한 명예가 주어져야 한다. 즉 그들은 마지막 아담과 닮아야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의 백성은 죄의 속박과 부패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실 것이다.(엡 5:27).

죄의 쾌락 혹은 사랑으로부터의 구원은 우리가 중생할 때 일어난다. 죄의 형벌 혹은 처벌로부터의 구원은 우리의 칭의시에 일어난다. 죄의 세력 혹은 지배로부터의 구원은 우리의 실제적인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성취된다. 죄의 실존, 혹은 내재로부터의 구원은 우리가 영화될 때 즉 "의롭다 하실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실"(롬 8:30)때 극치를 이룬다.

우리 주제의 이 네 번째 면에 대해서는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자라나게 하고, 소망을 키우며, 사랑을 이끌어 내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앞에 놓은 경주를 인내로써 달려가도록" 하기에는 충분하게 알려져 있다.

현재 상태로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기쁨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첩자들이 가나안 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것들의 본보기로서 "에스겔 골짜기 포도송이"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곳에 있는 그의 기업을 미리 맛보고 보증받을 수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구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우리는 바로 영화된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르도록 예정되어 있다. 변화산 위에 계신, 즉 은혜있는 제자들에게 그의 영광이 미리 보여진 때의 주님을 바라보라.

다소의 사울이 한 번 잠깐 보게 됨으로써 그의 눈이 일시적으로 멀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눈부신 빛이었고 밧모섬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계 1:17) 되었다.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람의 빛 속에서 생각할 때에 가장 잘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받으셨던 몫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즉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의 아버지의 사랑에 관하여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셨다"(요 17:13)라고 확신시켜 주셨을 때, 그러므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라고 그리스도는 약속하셨다.

그러나 신자가 죽을 때에 죄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가? 그렇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그것은 영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몸은 부패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의 몸에 대해서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전 13:42-44)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죄의 실존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진다.

이것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라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마의 땀으로 매일의 양식을 벌어들이는 것은 그치는 것보다 도대체 무엇이 더 행복한 일이겠는가? 그런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도 역시 그러하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죄와 싸우는 수고, 즉 내재하는 부패와 사단과 세상과의 고통스런 갈등에서 쉼을 얻는다. 이제 믿음이 벌이는 수고는 그때 끝나고 죄로부터 완전한 구원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된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