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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46]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46]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

En Hakkore 2024. 4. 13. 07:55

1. 자연인은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한 요한복음 6:44을 인용하여 보자.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조차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이유는 인류의 타락이 초래하였던 끔찍한 파괴를 그들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자기들의 마음의 '병'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8:28). 만일 성령께서 영적인 죽음의 잠으로부터 그들을 깨웠더라면, 또한 그들로 본래 처해 있었던 두려운 상태에 대하여 깨닫게 하여 주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을 가진 데 대하여 깨닫게 된다면(롬 8:7) 틀림없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 엄숙한 말씀에 대하여 더 이상 흠을 잡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자는 영적으로 느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자연인의 전적 무능력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필수적인 기능의 결핍에 있지 않다. 이 사실을 명백히 주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타락한 인간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의 결과가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기능 중에서 어떠한 것도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사실은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인간이 그 기능을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빼앗겨 버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조물주의 영광을 위하여 그 기능을 사용할 능력을 빼앗겨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인간이 소유했던 것과 똑같이 영과 혼과 육의 세 가지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의 요소는 비록 각 요소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부패하였다 할지라도 완전히 파멸되지는 않는다. 즉 영적인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엡 4:18). 영적으로 죽은 사단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지극히 활기있고 활동적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께로 오려는' 타락한 인간의 무능력은 육체적 결함이나 정서적 결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주막으로 걸어가기 위한 발을 가진 것과같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으로 그를 인도하기 위한 발도 가지고 있다. 그가 세상의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것과 같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도 가지고 있다.

그가 지금 쓸데없는 말이나 어리석은 노래에 사용하고 있는 입술과 목소리를 가진 것과같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입술과 목소리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가 지금 자기의 사업에 관련된 일을 하느라고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사고능력을 가진 것과같이 하나님의 일과 영원한 일에 대하여 숙고하기 위한 사고능력도 갖고 있다.

인간이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자가 그에게 부여해 준 능력을 오용하는 것이며 인간의 죄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종으로 하여금 구원받지 않은 그의 청중들에게 항상 이러한 일들을 강조하게 된다.

2. 인간의 무능력은 그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영적 무기력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서 좀 더 깊이 연구해야만 한다. 아담의 타락과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이 지극히 저하되고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그를 새롭게 하여 주고 새로운 본성을 심어주기 전에는 어떠한 인간도 '그리스도께로 오는 일'이나 '그를 사랑하며 섬기는 일'이나 그의 규칙에 따라 복종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보다 좀 더 고귀하게 그를 존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쓴 샘은 단 물을 낼 수가 없으며,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명백하게 생각해 보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것이 독수리의 본성이다. 사실상 독수리는 깨끗한 곡식을 먹으며 사는 암탉과 똑같은 육체를 지녔으나 그것은 깨끗한 곡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진흙 속에서 뒹구는 것은 돼지의 본성이다. 사실상 돼지는 초원으로 거니는 네 발을 지닌 양과 똑같이 네 발을 지녔으나 돼지는 푸른 초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중생되지 아니한 자도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생하지 않은 자도 중생한 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그러한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담이...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창 5:3). 이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상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대단히 대조적이다. 중간에 아담이 타락하였으므로 타락한 부모는 자기 자신의 타락을 자기 자녀에게 유전하기 때문에 타락한 자녀를 낳을 수밖에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욥 14:4).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시인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나중에 은혜가 인간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본래 다윗은 (우리처럼) 허물과 죄악의 덩어리였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참으로 일찍 이러한 타락한 본성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나타내느니라"(잠 20:11). 그 마음의 악한 버릇은 곧 나타나게 된다. 즉 오만과 자아의지와 허영심과 거짓말과 선을 행하기를 싫어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일찍 나타나는 나쁜 열매들인데 그것들은 그들을 부패시킬 뿐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