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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00] 이삭을 제물로 바침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00] 이삭을 제물로 바침

En Hakkore 2024. 3. 19. 11:02

5.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두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6 하반절).

아브라함의 손은 불을 들고 있었다. 성경에서 "불"은 신적 심판을 상징한다. 그것은 죄를 영속적으로 태우는 신적 거룩하심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악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 신적 본성의 완전함이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길을 가로막은 화영검에 의해 최초로 나타났다(창 3:24).

그리고 그것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이 창세기 22장의 모형 가운데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불"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자의 머리 위에 떨어진 신적 심판의 두려운 폭풍을 가리킨다. 이삭의 아버지가 손에 불과 칼을 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셨다"(사 53:4).

6.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7, 8절).

여기의 아브라함의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어린 양"을 "준비" 하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준비할 수 있으셨다.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은 아무것도 신적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다.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필요하다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준비하셔야만 한다. 나아가 하나님이 "어린 양"을 준비하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사람들에게 축복이 흘러들어올 수 있게 되기에 앞서, 먼저 신적 공의와 거룩하심의 요구가 만족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 죽으셨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이것이 본문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는지 주목하라. 하나님 자신이 어린 양을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7.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9-14절). 💕

여기에서 모형은 이삭으로부터 "그를 대신하여 드려진" 숫양으로 바뀐다. 이것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얼마나 아름답게 예표하는가! 이삭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미 사망의 장소에 있었다. 그들은 결박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신적 공의의 칼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갈 3:8).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우리는 여기와 같은 이중적인 상징(즉 이삭과 숫양)을 발견한다. 예컨대 속죄일의 두 마리의 염소라든지 혹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두 마리의 비둘기 같은 것들 말이다.

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이와 같이 창세기 22장의 모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제단 위에서 제물로 드려진 것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사흘 만에 이삭을 다시 돌려 받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때로부터 아들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때까지 사흘이 경과했기 때문이다.

그 사흘 동안 그의 아들은 그에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22장의 상징은 놀랍게도 은연중에 그리스도의 승천까지도 암시한다.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이 제물로 드려진 후,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그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19절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창세기 22장의 상징은 이삭을 그가 제물로 드린 산 위에 그냥 남겨 두었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