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창세기 강해 97] 이삭의 탄생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97] 이삭의 탄생

En Hakkore 2024. 3. 19. 11:00

셋째로,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다툼과 반목을 일으켰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 21:9).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의 시대적 의미와 적용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4:29).

우리는 여기의 상징을 개인적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를 상징하며,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상징한다. 이삭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의 진짜 성격이 드러났다. 그와 같이 우리가 거듭나 새로운 본성을 받을 때, 바로소 육체는 자신의 참된 색깔을 드러낸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던 것을 주목하라.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자연의 산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적 능력의 역사(役事)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두 아들은 각각 모든 면에서 총체적으로 다른 두 원리를 대표한다. 이와 같이 신자 안에는 서로 다른 두 본성이 있다.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육체는 영을 거스리고 영은 육체를 거스른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 특별히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 신자 안에 두 본성이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탄생은 옛 본성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본성을 받는 것은 옛 본성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 안에 있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은 서로 대적하며 거스른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거듭나는 것이 옛 본성이 경험하는 어떤 변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변화가 점진적으로 계속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전인(全人)이 변화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약의 다양한 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개선되고 개량될 수 있단 말인가? 바울 사도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개량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를 따라 행한 것은 결국 육체일 뿐이다.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않는다'(잠 27:22). 미련한 자를 지혜로운 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미련함에 의해 지배되어 왔던 마음 안으로 하늘의 지혜가 부어져야만 한다." 💕

넷째로, 이삭의 탄생이 이스마엘의 진짜 성격을 드러낸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이삭이 탄생할 때까지 실제적으로 이스마엘의 실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가 나타나자마자, 하갈의 아들의 진짜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전에는 매우 조용하고 예의바른 아이였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리는 능력에 의해 태어난 아이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이스마엘은 그 아이를 핍박하며 놀림으로 자신의 진짜 성격이 드러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상징은 분명하다.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옛 본성의 진짜 성격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거듭나기 전까지 육체가 얼마나 악하고 두려운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거듭나는 것을 옛 본성이 개량되는 것으로 생각해 온 사람들에게, 육체의 끔찍한 부패를 인식하는 것은 충격이고 종종 그의 영혼을 극심한 혼란에 빠트린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거듭나지 못한 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육체의 진짜 성격을 깨닫고 그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가장 분명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체의 악함에 대해 맹인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영과 육 사이의 다툼이 있는 것은 거기에 두 본성 즉 "이스마엘 본성"과 "이삭 본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이스마엘의 진짜 성격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섯째로, 이삭은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21:4).

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삭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할례는 우리의 영적 할례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0, 11).

우리는 법정적으로 할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할례는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할례는 - 상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덟째 날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땅으로 데려간다. 골로새서 3:9이하를 보라.

여섯째로,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21:8).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시 멋진 상징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이삭은 어머니의 젖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자랐다". 이것은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새로 태어났을 때 우리는 단지 영적인 어리아이에 불과하며, 우리는 말씀의 젖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자란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여기의 "큰 잔치"에 대해서는 오늘 다루지 않고자 한다.

일곱째로,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알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시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매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21:9-14).

마침내 다툼은 끝난다. 이삭을 "박해한" 자는 이제 "쫓겨난다"(갈 4:29).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법정적으로 육체의 생명은 이미 우리에게 끝났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지금 법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만간 경험적으로 사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때, 육체를 영원히 벗어버릴 것이다. 마치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말이다. 여기의 상징이 얼마나 정확한지 보라.

이삭이 "자라 젖을 떼기" 전까지, 박해하는 이스마엘은 쫓겨나지 않았다. 이것을 오늘의 마지막 교훈으로 삼자. 조만간 우리의 이스마엘은 쫓겨날 것이다. 조만간 "우리의 낮은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것이다(빌 3:21). 조만간 구주께서 다시 오시고 우리는 "그와같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를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3:2). 이것은 얼마나 복된 약속인가!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소망인가! 지금 우리 안에 저급한 육체가 있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복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더욱 간절히 열망하도록 만들지 않는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