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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95] 이삭의 탄생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95] 이삭의 탄생

En Hakkore 2024. 3. 19. 10:59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다. 여호와는 이 아이의 탄생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어떤 아이의 탄생과 관련하여 이 아이보다 더 많이 말씀한 아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직 한 아이 즉 더 위대한 "아브라함의 아들"만 제외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7:15, 16). 이러한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다음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17절). 그러한 약속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재확인되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0).

이때 사라는 장막 문 뒤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때의 사라의 반응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이요"(12절). 이성(理性)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다. 아브라함의 "웃음"은 감사와 기쁨의 웃음이었지만, 사라의 웃음은 불신의 웃음이었다.

어떤 위기의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을 때 그가 우리의 입에 채우시는 웃음이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1, 2).

그런가 하면 냉소적이며 불신앙적인 웃음도 있다. 전자의 웃음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웃음은 사라의 경우처럼 우리를 겁쟁이와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라는 말씀을 듣는다(히 11:11).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그녀의 불신앙적인 웃음과 조화시킬 것인가?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명백한 모순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믿음과 불신앙 사이의 싸움이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믿음이 주도권을 쥐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불신앙이 주도권을 쥔다. 그러나 신약에서 사라의 불신앙이 간과되고 그녀의 믿음만이 부각되는 것은 얼마나 복되며 감사한 일인가! 그것은 라합이 거짓말을 한 것이나(히 11:3), 욥이 괴로움 가운데 불평하며 탄식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약 5:11).

또 이삭은 기적의 자녀였다. 사라의 태는 "죽은" 상태였다(롬 4:19). 따라서 그녀가 잉태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힘"을 받아야만 했다(히 11:11). 두 말할 것 없이 여기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이 예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을 부인하는가! 우리 구주의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은 "기독교 체계 전체가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 즉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이삭의 기적적인 탄생으로 다시 돌아오자.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탄생이 예표적으로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도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죽은 태를 다시 살리시고 잉태하게 하셨다면,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이 처녀가 아이를 낳도록 만든 것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로서 여겨져야만 한단 말인가!

이삭의 탄생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최소한 일곱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

첫째로, 이삭이 약속된 아들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도 그러했다(창 3:15; 사 7:14).

둘째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약속하신 때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때 사이의 긴 간격을 생각해 보자. 창세기 21:1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라는 말씀은 가깝게는 창세기 17:16과 18:14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멀게는 창세기 12:7의 최초의 약속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겠다는 약속과 그것이 실제로 성취된 것 사이에는 긴 간격이 있었다.

셋째로, 이삭의 탄생이 예고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사라는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라고 물었다(창 18:13). 그리고 곧바로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응답이 되돌아왔다(14절). 이것은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구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때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물었다(눅 1:34). 그러자 곧바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라는 응답이 되돌아왔다(37절). 이와 같이 두 경우 모두에서 아기가 탄생할 것이 예고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선언되었다.

넷째로, 이삭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주어졌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 21:19). 이것을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과 비교해 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1).

다섯째로, 이삭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태어났다(창 21:2). 마찬가지로 주 예수와 관련하여 우리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는 말씀을 읽는다(갈 4:4).

여섯째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삭은 기적적으로 탄생했다. 이것은 임마누엘의 성육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곱째로, 웃음을 의미하는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을 보여 준다(그것은 사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 21:3). 이것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이러한 일곱 가지 모형들은 성경의 신적 영감과 함께 창세기가 "성령에 감동된"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을 증명한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