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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84] 99세 때의 아브라함(창세기 17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84] 99세 때의 아브라함(창세기 17장)

En Hakkore 2024. 3. 18. 11:01

우리는 아브람의 일생 가운데 또 한 번의 중요한 위기에 도달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신자들의 조상을 다루실 때 여호와의 비할 데 없는 은혜를 또 보게 될 것이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은" 이래 13년이 지났다(창 17:25을 보라). 이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숫자인가! 성경에서 "13"은 항상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불신앙과 배반과 배교와 관련되는 숫자이다. 이 숫자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14:4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들이 십이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년에 배반한지라"라는 말씀을 읽는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와 비슷했다. 그는 75세 때에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이후 거의 12년 동안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처럼 하여 참았다.

그러나 86세 때에 그는 믿음의 길로부터 돌이켜 육체의 생각을 따랐다(창 17장 1절과 25절을 참조하라). 그는 사라의 제안에 따라 아들을 얻기 위해 애굽인 여종 하갈을 첩으로 취했다. 이후 13년이 지나는 동안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기간은 하늘의 침묵 가운데 지나갔다. 그 기간은 공백이며, 영적 불모의 기간이었다. 그 기간은 명백히 나무와 풀과 짚 외에 아무것도 맺지 못한 기간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숫자 13이 배반과 불신앙과 관련되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13"은 성경 전체를 통해 악한 숫자로 나타난다(왕상 7:1; 창 6:38; 에 3:12-13 등을 참조하라). 그것을 보여 주는 실례(實例)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완강한 여리고 성벽을 13바퀴 돈 것과, 배교의 책인 사사기에 13명의 사사들이 등장하는 것과, 마가복음 7:21-23에서 주님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13가지를 열거하신 것과, 계시록에서 "용"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13번 나타나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또 그러한 시실을 우리는 성경에 "13"의 배수(倍數)가 나타나는 다양한 구절들에서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야곱은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evil)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말한다(창 47:19). 130은 13에다가 10을 곱한 숫자이다.

또 민수기 16장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멸망을 당한 사람이 모두 14,950명이었음을 발견한다(민수기 16장 35절의 250명과 49절의 14,700명을 더하면 14,950명이 된다). 14,950은 13에다가 1,150을 곱한 숫자이다.

또 신명기 14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동물들의 목록이 나오는데, 그 숫자를  주의 깊게 세어 보면 모두 26가지가 된다(7-19절을 보라). 26은 13에다가 2를 곱한 숫자이다.

또 바울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다(고후 11:24절). 39는 13에다가 3을 곱한 숫자이다. 또 기독교 세계의 배교를 다루는 유다서는 신약에서 스물여섯 번째 책이다. 26은 13에다가 2를 곱한 숫자이다.

이 모든 실례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창세기 16장에 기록된 사건과 17장에 기록된 사건 사이의 13년의 간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 기간은 하늘의 침묵 가운데 지나간 영적 불모의 기간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오랜 침묵 후의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나타나심을 살피기에 앞서 먼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브람에게 있어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다시금 스스로를 나타내시면서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기에 앞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로마서 4:19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행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은혜가 나타날 수 있기에 앞서 먼저 사람의 자아(自我)가 종말에 이르러야만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무능력을 배워야만 한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처했을 때 비로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라는 말씀이 임했다(출 14:13).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람의 몸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었다. 하나님의 기회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도달할 때 비로소 임한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것은 매우 큰 실제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중까지 미루시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옳은 일을 행하시며, 최선의 일을 행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항상 합당한 시간에 그리고 최선에 행하신다.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하나님은 때가 찼을 때 비로소 그 아들을 보내셨다. 바로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쓰라린 마음으로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재림을 미루시는 이유 말이다.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우리 역시도 종종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라고 쓰라린 마음으로 묻곤한다(삿 5:28).

아, 그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 "때가 차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미루심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이 그 아들의 재림을 미루시는 것은 그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