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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65] 아브라함을 부르심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65] 아브라함을 부르심

En Hakkore 2024. 3. 17. 10:50

이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람에게 임한 것은 그가 메소보다미아 즉 페르시아 만 인근에 위치에 있던 갈대아의 우르라는 도시에 있을 때였다.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은 때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벨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진 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다른 죄들에다가 우상 숭배의 죄를 더했다.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기 직전의 세상의 종교적 상태와 관련하여 로마서 1장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1-25절).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사"라는 표현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을 발견한다. 즉 하나님은 먼저 당신께 대하여 등을 돌린 자들로부터 등을 돌리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이 창세기 11장과 연결된다고 믿는다. 그때 하나님은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다(행 14:16).

아브라함이 속한 가문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여호수아 24:2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조상들 역시도 우상 숭배 가운데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건의 배경이다. 나라들을 (일시적으로) 그냥 내버려 두신 하나님은 이제 선택된 나라의 조상이 될 사람을 택하신다. (바벨에서)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은 이제 은혜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이와 같이 행하셨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그의 무한한 지혜를 따라, 심판은 단지 그의 구속의 사랑을 더 크게 나타내기 위한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될 뿐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침내 이방인들을 부요케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대환난 시기에 신적 진노가 쏟아지는 것은 단지 천년왕국의 복이 임하기 위한 전조(前兆)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크고 흰 보좌의(계 20:11, great white Throne) 심판 뒤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따를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義)가 "거하며"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조상이 될 자가 부르심을 받았다. 그 나라는 하나님을 증언하며, 그의 계시를 보존하며, 궁극적으로 그의 복이 모든 민족들에게로 흘러들어가는 통로가 될 나라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창세기 11장과 12장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은혜의 부르심으로 자기 백성을 갖고자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연인의 모든 요구가 부인됨으로써 신적 긍휼이 값없이 흐를 수 있게 된 연후에 그렇게 될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전적 부패가 홍수 이전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또 다시 바벨에서 충분하게 드러나고 난 연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 아브람을 다루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주권적인 은혜로 부르신 사실은 하나님이 처음에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그의 자연적인 상태 가운데 온전히 나타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택하시는 것은 그에게 그럴 만한 특별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하셨을 때, 그에게는 그럴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었다. 택하심의 이유는 항상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서 찾아야만 한다. 택하심은 항상 "은혜로" 말미암는다(롬 11:5). 💕  

그러므로 그것은 택함 받는 대상의 어떤 자격에 - 실제적인 자격이든 보이지 않는 자격이든 - 의존하지 않는다. 만일 택하심이 택함 받는 대상의 어떤 자격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브람 안에 어떤 자격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이사야 51:1-2의 언어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난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주권적이며 기쁘신 뜻 가운데 행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사도행전 7:3에 나타나는 것처럼, 이러한 부르심이 아브람에게 임한 것은 그가 고향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였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는 부르심이었다. 그것은 자연인의 멍에의 줄을 끊으라는 부르심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노아안에서 보았다. 역사(歷史)와 경험에 있어서의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의 연결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옛 세상의 심판을 통과하여 새 땅으로 나온 노아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면서 장차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실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는 아브람은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그것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 믿음으로 행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나그네와 의인으로 살도록 부름받은 자를 상징한다. 한 마디로 아브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자들에 대한 하늘의 부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