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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63] 니므롯과 바벨탑(장문)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63] 니므롯과 바벨탑(장문)

En Hakkore 2024. 3. 16. 10:55

이제 창세기 10장과 11장의 두 삽입구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길이 준비되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창 10:8).

여기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니므롯이 구스의 아들로서 함의 자손이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는 "저주"가 그 위에 임하여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다음으로 우리는 "첫"(first)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것은 그가 우월함을 위해 투쟁한 개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의지(意志)의 힘으로 그것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용사"라는 표현을 주목하라. 이것은 정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10:9).

여기의 짤막한 문장속에 "여호와 앞에 용감한 사냥꾼" 이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용감한"(mighty)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0장에서 세 번 그리고 또 다시 역대하 1:10에서 니므롯에게 적용된다. 그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기보르"이다.

그 단어는 구약에서 "우두머리"로 번역된다. 또 역대상 1:10은 창세기의 구절들과 정확하게 일치된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세상에서 첫 영걸이며." 갈대아 역본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쓴다. "구스가 또 악에 있어 첫째 가는 니므롯을 낳았으니 이는 그가 무죄한 피를 흘리고 여호와께 반역했기 때문이며." 계속해서 "여호와 앞에" 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라.

우리가 이러한 표현을 창세기 6: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의 비슷한 표현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여기에 니므롯이 불경건한 야심과 계획으로 전능자에 대해 노골적으로 도전했다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창세기 11장의 내용은 이러한 해석을 확증해 준다.

"그의 나라는 바벨에서 시작되었으며"(창 10:10).

여기에 창세기 11장의 처음 아홉절을 여는 열쇠가 있다. 그리고 여기는 성경에서 바벨이라는 단어가 처음 언급되는 장소이다. 다른 언어들이 성경에서 처음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의 경우 역시 주의 깊은 고찰을 요구한다.

그 시대의 언어에서 바벨은 "하나님의 문"을 의미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단어는 하나님이 그것에 내린 심판으로 말미암아 "혼잡"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암시들을 함께 연결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니므롯이 스스로를 머리로 하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적인 새로운 예배를 제정했음을 배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니므롯은 - 훗날 불법의 사람이 그렇게 할 것과 마찬가지로 - 신적 영광을 요구하고 또 받은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상 숭배의 시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단어의 첫 언급이 그것의 미래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을 또 다시 보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바벨론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약속의 땅에서 어떤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으로 죄 가운데 넘어지게 만든 것은 "시날 산(바벨론)의 아름다운 외투"였다(수 7:21). 또 계시록 17장에서 "붉은 빛 짐승"을 탄 음녀는 "큰 바벨론"이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바벨 땅으로부터 니므롯은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큰 성읍 레센을 건설했다"(10:11, 12). 이로부터 우리는 니므롯의 야심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 11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창세기 11:1-9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의 빛 안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온 땅의 언어가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쪽으로부터(from the east)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11:1, 2 한글개역개정판에는 "동방으로 옮기다가"라고 되어 있음). 이러한 지리학적인 언급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라든지 혹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등의 표현이 도덕적인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동쪽으로부터"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즉 그들은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이다. 계속해서 "시날 평지"라는 표현을 주목하라.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이 아니라 평지였다.

창세기 11장에 니므롯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장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와 "왕"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여기에 묘사된 반역을 조직하고 주도한 것이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절).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도전을 발견한다. 그것은 노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이며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9:1). 그러나 그들은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니므롯의 야심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는 통합의 중심인 도시이며, 둘째는 사람들을 고무하여 움직이기 위한 동기(動機)였다. 후자는 "우리 이름을 내고" 라는 표어 안에서 제시되었다. 이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과도한 열망이다.

니므롯의 목표는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인류 전체를 자신의 지도력 아래 묶는 것이었다. 그리고 "탑"의 개념을 높음의 개념이라기보다 강함의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강한 요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혼돈)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11:6-9).

세상 역사(歷史)속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또 다시 인류는 배교의 죄 가운데 떨어졌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런 방법으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심으로써 니므롯의 계획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하셨다.

여기에 역사(歷史)의 가장 놀라운 기적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이것과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방언"(tongues)의 기적이 임한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개입의 결과 많은 민족들이 생겼으며, 바벨탑이 무너진 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계"가 형성되었다.

인류는 두 번 하나님을 버렸다. 한 번은 홍수 전이었으며, 또 한 번은 홍수 후 바로 여기에서였다.

요약해 보자. 니므롯과 그의 계획 안에서 우리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를 세우고자 하는 사탄의 최초의 시도를 본다. 자기 영광을 위한 그의 터무니없는 열망 속에서, 그가 휘두르는 강력한 권력에서, 그가 사용하는 무자비하며 야수적인 방법에서(사냥꾼이라는 단어에 나타나는 것처럼), 창조주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도전에서(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면서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 안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벨론(하나님의 문) 왕국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고자 시도하는 것에서, 그리고 그의 나라의 멸망이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라는 말씀에 묘사되는 사실에서 - 우리는 여기의 역사적 이야기의 기저(基底)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깊은 것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적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멸망을 보여 주는 완전한 상징과 모형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의 흥미로운 사건과 관련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상징적인 교훈을 개략적으로 나타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연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