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창세기 강해 51] 방주의 모형론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51] 방주의 모형론

En Hakkore 2024. 3. 16. 10:27

8. 방주는 "상 중 하 삼층으로" 만들어졌다(6:16).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4,000년 후에 사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방주가 몇 층으로 된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일 층으로 되었든 십이 층으로 되었든 도대체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경건한 학자들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는 사실을 배워왔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정결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모세를 "감동"시켜 창세기를 기록하게 하실 때, 그는 그 책이 수천 년 후의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읽힐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곳에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을 담아 놓으셨다.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 15:4). 그렇다면 우리는 방주가 더도 덜도 아닌 삼층으로 된 사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방주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심판의 물을 통과한 것이라든지, 물속에 잠긴 것이라든지, "일곱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에 머무른 것이다(8:4) -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의 날을 상징하는 것이다. - 등에서, 방주는 그리스도의 분명한 모형이었다.

그렇다면 방주의 내부는 분명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 틀림없다. 방주가 삼 층으로 나누어진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삼중적인 구원을 암시하지 않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구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삼중적인 구원이다.

그것은 우리의 삼중 구조 즉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포괄하는 구원이다(살전 5:23). 또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으며,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으며, 장차 죄의 실재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삼중적인 구원이다.

9.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위"에다가 창을 내라고 명령하셨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을 내고"(6:16). 이것의 영적 의미는 명백하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의 옆과 아래에서 펼쳐지는 멸망의 장면을 바라보아서는 안되었다. 그들은 오직 위를 향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교훈이 가르쳐졌다. 낮에 그들을 인도하기 위한 구름기둥과 밤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기둥은 단지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만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주위를 바라보며 광야의 위험과 역경 따위에 매몰되는 대신, 눈을 들어 크신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 역시도 우리의 눈을 위로 향한 채 광야와 같은 여행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항상 위의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만 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

10. 방주에는 여러 개의 "칸들" 혹은 "둥지들"이 있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6:14 관외에는 "칸들"[rooms]이라는 단어 대신 "둥지들"[nests]이라는 단어가 사용됨). 히브리어 "겐"(gen)이 나타나는 구약의 다른 모든 구절들에서, 그 단어는 "둥지"로 번역된다.

나는 여기에다가 영적인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을 마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방주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을 나타내는 매우 포괄적이며 두드러진 모형이라는 사실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의 표현에도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여기의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 이상의 어떤 것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처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둥지 안에 있는 새들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보시는 대상이다. 방주 안에 있는 "둥지들"은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기 위해 가신 - 아버지의 집에 있는 "거할 곳들"(mansions)을 가리키지 않는가(요 13:2)?

여기에서 "거할 곳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 불확실성이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웨이마우스(weymouth)는 그것을 "내 아버지 집에 안식처가 많도다" 라고 번역한다.

11. 방주와 관련하여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몇몇 세부적인 것들 안에 나타난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6:14). 여기의 "역청"을 위해 사용된 히브리어는 통상적으로 그와 같이 번역되는 "제테트"가 아니라, 구약에서 70회나 "속죄하다"로 번역되는 "카페르"이다.

"카페르"의 일차적인 의미는 "덮다"이며, 그것은 여기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역청"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속죄는 죄를 덮은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독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충분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여기에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합 1:13). 그러므로 죄는 피로 덮여져야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여기의 "카페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방주와 관련하여 처음 사용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난처가 오직 속죄의 피 아래서 발견될 수 있음을 가르치려고 의도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또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방주 위에 폭풍이 임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신적 심판의 폭풍이 우리의 사랑하는 구속자에게 임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시 42:7). 그의 이러한 말씀은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방주의 모형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12. 방주의 상징적인 교훈은 속죄의 진리를 넘어 부활 자체에까지 이른다.♡

여기에서 최근에 작고한 윌리엄 링컨(William Lincoln)의 글을 인용하도록 하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른 날은 우리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방주는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8:4). 그러나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명령하신 바에 따라 일곱째 달은 첫째 달로 바뀌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월절은 첫째 달 십사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유월절로부터 삼일 후, 그러니까 첫째 달 십칠 일에 심판의 물을 통과하여 땅에 서셔서 다시금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과 그들은 영원한 안식의 항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의 모형은 단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예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승천의 사실까지도 암시한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8:4). 방주의 최종적인 안식처는 산꼭대기 위에 있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높은 곳"을 상징하지 않는가?

우리는 성경이 결코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감(靈感)된 말씀이라는 굳은 확신과 함께 팬을 놓는다(벧후 1:16)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21

■ 베드로후서 1장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