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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301] 감사의 노래 4(사무엘하 22장)
En Hakkore 2024. 3. 7. 12:01넓은 곳으로 인도하심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0).
영감을 받아 쓰인 이 노래의 세 번째 부분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 부분에서 다윗이 의도하는 주된 목표는 자신은 자기가 받았던 극심한 공격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그런 공격을 받아 마땅할 만큼 잘못한 일이 없음을 보임으로써 자신을 옹호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자기를 구원하시면서 의롭게 행동하셨음을 확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중요한 생각을 계속해 나가기에 앞서 잠시 여호와의 방식을 살펴보고 그것에 대해 존경을 표하자.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시다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적을 무찌르신 후에는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신다. 요셉은 여러 해 동안 감옥에서 슬픔을 겪은 후 마침내 궁궐로 입성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부터 왕좌로 나아갔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다루시는 아주 중요하고도 복된 원리 중 하나를 예시한다. 압제와 낙심에 시달리는 자들이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원리를 붙잡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위로를 제공한다.💕
영적 경험에서도 늘 왕궁에 앞서 감옥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을 때뿐 아니라 우리의 기독교적 삶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반복된다.
우리의 영혼은 "넓은 곳"으로 인도되기 전에 골방에 감금된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 종의 영에 붙들려 시달린다(롬 8:15).
우리의 연약한 배는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시기 전에 거센 파도에 시달린다(마 14:22-33).
사랑하는이여, 당신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다음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한 동안의 슬픈 감금 상태가 끝난 후에는 우리의 정신이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런 슬픔의 시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라.
요셉은 감옥에서 죽지 않았고,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생을 마치지 않았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때로 우리는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그 기쁨의 날을 미리 맛보도록 허락받는다. 그러나 설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밤이 끝나면 모든 슬픔 역시 끝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우리가 이 노래의 구절들을 살필 때 다윗의 대형(antitype)이신 분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비한 몸(교회-역주)의 지체들의 경험은 그 몸의 머리이신 분이 겪으신 일과 돌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역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삼하 22:19). 구세주 자신이 재앙의 날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렇다면 어째서 구속받은 자들이 그와 동일한 것을 경험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야 하는가? 그분은 무자비한 적들에게 포위되셨다. 그분이 사로 잡히셨을 때 그분의 자유는 빼앗겼다. 그분은 뺨을 맞으셨고 채찍질을 당하셨다.
제자는 그의 스승만큼만 되면 족하다. 오, 우리 역시 그분과 더불어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렇다. 그분은 또한 "[그분이]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렇다. 그분은 무덤에서 구출되셨고,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사 42:1).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구절에서 우리의 관심을 다윗의 대형이신 분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예를 들어, 매킨토시(C. H. MacKintosh)는 다윗의 노래의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구절들[21-25절]은 우리가 이 노래 전체를 통해 다윗보다 크신 분을 만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21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은 시편 51편에 나오는 말과 얼마나 다른가! 거기에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1절)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타락한 죄인에게 적합한 말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그렇게 느꼈다.
그는 감히 자신의 의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 의란 누더기나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얻은 보상과 관련해 그는 자기가 자신의 실제 모습에 근거해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불못[the Lake of Fire, 계 20:14)뿐이라고 느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에 실려 있는 말은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설교자들의 선생임을 자처하고 그 자신이 기독교의 "교파들"(sects) 혹은 "세계들"(systems)이라고 부르는 곳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종들의 설명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혼란스러운 생각이 나왔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는 말씀을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그런 말씀은 빌립보 3장에 나오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7-9절).
분명한 사실은 바울은 이 각각의 구절들에서 서로 아주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는 자기가 하나님께 용납된 근거를 밝히는 반면,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자기의 사역자로서의 충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편 51편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근거에 대해 진술하고, 사무엘하 22장 21-25절에서는 자신이 적들과의 관계에서 잘못을 범한 일이 없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킨토시가 속한 학파에 속한 어떤 이가 이런 신학적 구별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알렉산더 맥라랜(Alexander MacLaren) 같은 유능한 주석가가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구절에서 시편 기자가 의도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생애'(The Life of David as Reflected in his Psalm)라는 유익한 책에서 이 구절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이 노래(그리고 시편)가 다윗이 우리아와 곤련된 무서운 죄를 짓기 전에 쓰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이 구절들(20-25절, 그리고 시편 18:19-24에서 사실상 반복되어 나타나는 내용)의 요지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승리의 어조는 물론이고 그 자신의 순결함에 대한 이런 분명한 확언은 어느 쪽도 그의 타락 이후의 슬프고 어두운 시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0).
여기에서 "넓은 곳"은 다윗이 적들이 그를 격렬하게 뒤쫓고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했던 비좁고 갑갑한 동굴과 분명하게 대조된다. 그것은 또한 그가 은혜로 얻은 광대한 통치 지역과 큰 부요함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고 번성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자유와 영토의 확장을 하락하시면서 특별한 은혜를 드러내셨다. 이것은 "[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라는 말을 통해 암시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일반적 섭리를 따라서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언약의 사랑을 따라서 행동하셨음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구원에 수반되어 그의 영혼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 그리고 그가 그것을 통해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였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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