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The Life of David 265] 과도한 슬픔 2(사무엘하 19장) 본문
[The Life of David 265] 과도한 슬픔 2(사무엘하 19장)
En Hakkore 2024. 3. 5. 19:17백성들 사이의 소동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삼하 19:9-10).
이 구절은 요압의 개입이 얼마나 적시에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현재 이스라엘 왕국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스스로 분열하는 집은 서지 못한다. 강력하고 신속한 수단이 필요했다.
많은 백성들은 왕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했을 뿐 왕에게 전령을 보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일은 꾸물거리고 있었다. 대개 그렇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행동할 힘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처한 곤경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능한 통치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의심할 바 없이 다윗은 최고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용맹하고 유능한 지도자임을 입증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강력한 적들의 손에서 구해낸 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반역자가 되고 그의 백성들 중 많은 이들이 그 반역자의 편에 가담했을 때, 그는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압살롬은 죽었고, 그의 군대는 패주했다. 그로 인해 분쟁이 일어났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장로들이 먼저 일어나 다윗에게 연락을 취하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새로운 충성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을 것이다. 반면에 장로들은 백성들이 최근에 왕에게 불충했던 것을 두고 그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들은 상호간의 그런 맞비난을 통해 더욱 혼란스러워졌을 뿐 다윗을 왕도로 모셔오기 위한 그 어떤 실제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다.
화해를 위한 제안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삼하 19:11-12).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자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부족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우리가 친절을 기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자들로부터 늘 그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Matthew Henry).
아, 그 말은 얼마나 진실된가!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가장 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우리를 넘어뜨리고 가장 나중에야 우리를 돕는 것을 얼마나 자주 경험하는가! 아마도 성경에 이 사건이 기록된 주된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영적 형제들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경고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적게 기대할수록 실망도 적어질 것이다.
다윗 자신의 지파인 유대 지파가 그 일에 대해 진취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 역시 최근의 반역에 깊이 관여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왕에게 적절한 제안을 하는 일에서 지나치게 여유를 부렸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너무나 악하게 압살롬의 편에 가담하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의 호의를 다시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두려워했던 것 같다.
다윗은 신중하고 경건하게 제사장 가문에 속한 두 사람을 시켜 유다 장로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인 사독과 아비아달은 왕에게는 신임을 받고 백성들 대부분에게는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왕이든 백성이든 그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의 의로움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이들과 교제하면서 어떤 중재가 필요할 경우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현명하고도 유익한 일이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삼하 19:13).
아마사는 다윗의 여동생의 아들이었는데(대상 2:17), 압살롬은 그를 반역군의 사령관으로 삼았다(삼하 17:25). 그러므로 그는 다윗이 자기편으로 만들기를 바라던 유력한 집단의 지도자였던 셈이다. 더구나 다윗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만하고 견디기 힘든 요압의 힘을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그런 계획을 드러낸 것은 면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아마사가 다윗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자신이 책임을 맡은 첫 번째 군사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요압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삼하 20:10).
아마사에게 특별한 통지를 함으로써, 즉 그를 자신의 골육으로 자칭하고 만약 그가 자기 편에 가담한다면 모든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다윗은 이미 자기가 자신에게 극악한 일을 행한 자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분명한 암시를 준 셈이다.
"[그가]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삼하 19:14).
여기에서 "그"(He KJV,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역주)가 다윗을 가리키는지, 아마사를 가리키는지, 혹은 여호와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그것이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13절에서 "하나님"이 직접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그것이 다윗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다음 문장은 "그들이 그에게"('왕께'가 아니라-역주) 전갈을 보내어"가 되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아마사가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만큼 충분히 유명하거나 영향력이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갖고 계신 특권이기 때문이다(잠 21:11).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은 제사장들과 아마사의 설득을 통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셨다. 그럼에도 백성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뜻을 한데 모은 것은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시는 분의 덕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삼하 19:15).
다윗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자신의 귀환을 바란다고 확신하기 전까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환영하지 않는 자들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예표적 진리를 볼 수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분을 자신의 마음의 보좌로 모셔 들이는 자들만을 다그리실 것이고 초대받기 전에는 다스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의 권능의 날에 우리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뜻에 즐거이 헌신하게 하시고, 그 후에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실 것이다"(시 110:2-3)" (Matthew Henry).😊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146
'강해시리즈 > 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Life of David 267] 요단강가로 돌아옴(사무엘하 19장) (0) | 2024.03.05 |
---|---|
[The Life of David 266] 요단강가로 돌아옴(사무엘하 19장) (0) | 2024.03.05 |
[The Life of David 264] 과도한 슬픔 2(사무엘하 19장) (0) | 2024.03.05 |
[The Life of David 263] 과도한 슬픔 2(사무엘하 19장) (0) | 2024.03.05 |
[The Life of David 262] 과도한 슬픔 1(사무엘하 18장) (0) | 2024.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