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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235] 시므이의 저주(사무엘하 16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235] 시므이의 저주(사무엘하 16장)

En Hakkore 2024. 3. 3. 12:01

앞에서 나는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는 다윗을 "뉘우치는 참회자"라는 견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다윗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압살롬에 맞서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도덕적 약함 때문이 아니라 영적 강함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사건에 앞서 다윗은 오랫동안 그의 기운을 소진시키는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로 인해 압살롬의 반역을 시작 단계에서 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역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에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아들의 반역에서 자신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저지른 무서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보복을 보았고, 그로 인해 그분의 강한 손길 아래에서 자신을 낮췄다.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방식을 시인했다.🤞

그는 여호와의 섭리에 맞서 불평하면서 그분의 둥근 방패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대신 그분의 징계의 회초리 아래에서 온유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은 제 철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의의 열매"(약 3:18; 빌 1:11)였고, 또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 3:8)였다.

다윗을 겸손한 참회자로 바라볼 때 우리는 사무엘하 15장과 16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죄가 그를 찾아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는 그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그분의 책망을 온유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에게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혼자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라고 명령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던 것 역시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도망하면서 언약궤를 대동하는 것이 아주 부당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겸손한 참회자의 심정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고 맨발로 눈물을 흘리며 감람산을 올랐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의 모습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갔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살피려고 하는 사건에서 드러나는 그의 놀라운 태도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자의 자세

도망 중인 왕과 그의 소수의 추종자들이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사울 집안의 속한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가와 다윗이 저지른 적이 없는 무서운 죄를 그에게 덮어씌우면서 그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자 그 사악한 자는 다윗과 그를 수행하던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실 다윗은 그런 조롱을 못들은 체하고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그는 그런 조롱을 침묵하며 견디고 있는 것일까?

다윗의 수행원들 중 하나인 아비새가 자기 주인에게 그 자를 죽여 그런 모욕에 대해 복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막았고 시므이가 그 터무니없는 행동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다윗이 이 치욕적인 경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 16:10).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 즉 하나님을 악과 관계시키는 문제를 제기하는 말이었다. 다윗은 경솔하고 악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엄중하고 무거운 진리에 대해 말했다.

  다윗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겸손하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순종했다. 😊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므이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아비새는 사람만 보았고 그 자를 적절하게 처리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마치 훗날의 베드로가 그를 사랑하는 주님을 잡으러 온 살인자들의 무리에 맞서 그분을 지키려고 했던 것과 같았다.

베드로와 아비새 모두 표면에서 살았고 이차적 원인들만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가장 깊은 순종속에서 살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바로 이것이 그분에게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힘을 제공했다. 그분은 도구를 넘어서 하나님을, 즉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을 넘어서 그 잔을 채우고 계신 손길을 보았던 것이다. 그 도구가 유다이든, 가야바이든, 혹은 빌라도이든 상관없었다. 그분은 그 모든 도구들 안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볼 수 있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의 눈을 단지 명령을 이행하고 있을 뿐인 대리인들 위로 들어올렸다. 그는 곧장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맨발로 그리고 머리를 가린 채 그분 앞에서 몸을 낮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매일의 삶의 모든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이 우리의 영혼을 다루시는 일을 이해하는 데서 많이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차적 원인들을 바라봄으로써 덫에 걸린다.🥺

우리는 모든 일 안에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탄이 우리를 이긴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어나는 사건들 중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그분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에 더욱 민감해지기를!

그럴 경우 우리는 사람과 사물들을 우리의 아버지의 손에 있는 여러 대리인과 도구들로, 또한 아버지의 잔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의 마음은 엄숙해지고, 우리의 정신은 침착해지고, 우리의 마음은 차분해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아비새처럼,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는 베드로처럼 흥분해서 칼을 뽑지 않을 것이다. 감정적이고 그릇된 판단을 했던 이들 두 사람은 그들의 주인들보다 얼마나 열등했는가!

베드로가 뽑았던 칼날의 소리는 그의 주인의 귀를 거슬리고 그의 정신에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아비새의 말은 그 온유하고 순종적인 다윗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엄중하고 분명하게 다루신다면, 다윗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는 감히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사나 죽으나 그분의 것이었다-왕으로서든 추방자로서든 상관없이. 아, 복된 순종이여!"(C. H. M)💕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