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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207] 압살롬2(사무엘하 13-14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207] 압살롬2(사무엘하 13-14장)

En Hakkore 2024. 3. 1. 11:29

다윗의 딸 다말은 다윗이 다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인 암논에게서 악한 일을 당한 후 압살롬의 집에서 살았다. 그녀의 오라비인 압살롬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삼하 13:22a).

압살롬의 적의는 시간이 흘러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복수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그의 실제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 준다. 물론 죄와 상관없는 분노도 있다. 가령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막 3:5).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육신에는 불붙기 위운 본성이 너무 많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에 유념하면서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

그러나 압살롬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두 해 동안이나 타오르던 치명적인 불길을 끄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수를 이행하기 위한 문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벌고 있었을 뿐이다.

압살롬의 마음 안에서는 자신의 이복형제를 향한 누그러뜨릴 수 없는 증오의 불길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예리한 머리는 그 증오를 풀어낼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분명하게 마귀의 자식이었고, 기꺼이 자기 아비의 욕망을 채워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때까지는 "뱀의 교활함"이 "사자의 사나움"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둘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대적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 주님께 사용했던 술책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시험을 통해 그의 악독한 교활함을 보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통해 그의 잔혹감을 본다. 그는 지금도 그렇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상황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비열한 계획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깍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삼하 13:23).

영국에 곡식을 거둬 창고에 저장한 후 잔치와 오락을 하며 즐기는 "추수축제"라는 오래된 풍습이 있는 것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매년 "양털 깎기" 행사가 벌어졌다. 그때는 여러 친척과 친구들이 한데 모여 축제를 즐겼다.

이런 사실은 창세시 38장 12-13절과 사무엘상 15장 4절과 36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그리고 사무엘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이 기뻐하므로"

압살롬은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이복형제에 대한 비통한 증오를 무심한 표정 아래 감췄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읽기 때문이다.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삼하 13:22b).

그러나 이제 압살롬은 복수의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비열한 계획을 숨기고자 했던 그는 자기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갖고 있지 않은 희생자를 죽이기 위해 "왕의 모든 아들을"(23절) 잔치 자리에 초청했다. 오직 마지막 심판의 날에야 얼마나 많은 반역의 계획들이 겉보기에 친절함이라는 옷을 입고 이루어졌는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유다가 그의 주님을 배반한 것은 주먹질이 아니라 입맞춤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자신의 비열한 의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수고를 했다.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삼하 13:24).

이곳은 명백한 위선이었다. 압살롬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이 죽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게 할 마음까지 품고 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왕의 거창한 행차 때문에 자기가 꾸민 교활한 계획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삼하 13:25a).

이것은 다윗의 성품의 여러 가지 귀한 특성 중 하나를 잘 보여 준다! 다른 이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그는 자기 아들에게조차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25b절).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추겨 자기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하고 그의 손에서 그의 나라를 빼앗으려 했다!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25c절).

이것은 다윗이 아버지로서 아들 압살롬에게 복을 기원했다는 뜻이다.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삼하 13:26a).

여기에서 압살롬이 왕에게 곧 있을 가족 모임과 잔치 자리에 직접 참석해 주기를 간청했던 실제 의도가 드러난다. 다윗은 이미 자기 아들의 초대에 거부한 상태에서 그의 두 번째 요청마저 거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이 갖고 있는 아버지로서의 권위에 이렇듯 겉으로 복종하는 것은 그의 부정직함을 얼마나 잘 보여 주는가!

그는 암논을 자신의 그물에 빠뜨리기로 결심하고서도 겉으로는 형제애를 드러내면서 피에 굶주린 자신의 모습을 감췄으니 말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삼하 13:26b).

다윗은 분명하 무언가 불안을 느꼈다. 혹은 적어도 압살롬이 암논에게 그렇게 드러내놓고 후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6). 그것은 그 일과 결과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삼하 13:27).

압살롬은 왕의 좋은 판단력을 흐려놓았다. 혹은 다윗이 자신의 두 아들이 온전하게 화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압살롬의 간청을 들어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보아야 한다.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또한 "내가 어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리라"고 선언하셨다(삼하 12:10,11), 그리고 다윗이 그런 심판을 벗어날 길은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윗으로 하여금 암논을 압살롬이 배설한 잔치에 참석하게 함으로써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암논의 살해에 보조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 가련한 왕의 마음에 얼마나 무서운 타격이 되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처벌하시는 것은 또 얼마나 절대적으로 정당하셨는가!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