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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98] 승리의 전리품(수 13:1-33) 본문
[Gleanings in Joshua 298] 승리의 전리품(수 13:1-33)
En Hakkore 2024. 11. 18. 16:22여호수아 13장 역시 주석가에게 설명할 여지를 별로 남겨두지 않는다. 지리적인 상세한 사실들이 주요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 자신에게 주신 간결하면서도 복스러운 말씀에 뒤이어, 첫 여섯 절에는 이스라엘이 소유하지 못한 가나안에 남은 땅의 목록과 아울러 하나님이 그 땅의 거민들도 그분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시리라는 확신이 제시된다.
그 다음 여섯 절에서는 가나안 땅의 분배에 관한 여호와의 명령과, 일부 지명들과 그 경계가 제시된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가 두 지파와 반 지파에게 분배한 요단 강 동편의 기업들이 상세히 언급된다. 그리고 중간에 이스라엘이 발람을 죽인 일이 언급되고, 또한 모세가 레위 지파에게 기업을 주지 않은 사실이 두 차례 언급된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 대해 획일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심 주제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누린 승리의 전리품, 그리고 각 지파에게 활당된 몫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은 그 자신의 수고의 결과로 그 땅을 차지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값없는 선물로 그들에게 베푸셨지만, 그런데도 그들이 싸움을 통해 그 땅을 정복해야 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업을 정확히 그림자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업 역시 그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중보자께서 그 값을 치르셨다. 그러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은 상속자들은 친히 수고를 통해 그 기업을 누리게 된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신학자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의 수고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너무 적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만(이런저런 단편들만 꼬집어 지목하지 않고) 심각한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다음 질문에 올바로 답해야만 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히 4:11) 등의 권고 역시 정당하게 대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아 줄 아나니"(골 3: 24) 등의 말씀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진리의 균형이 유지될 것이니 말이다. 주께서 값 없이 베풀어 주신 것 이외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선한 것도 신령한 것도 없다. 정말로 그렇다. 그러나 과연 신자가, 마치 하늘에서 소나기와 따뜻한 햇볕을 받아 땅이 비옥해지는 것처럼, 그냥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라는 뜻일까?
진리의 말씀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매우 조심하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몫을 행하실 것이다" 라는 식의 발언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존귀를 하나님과 우리가 나눠 가질 수가 없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고, 우리에게는 자랑을 근거가 전혀 없다.😎
택함 받은 자들 자신은 그들이 택함 받은 사실에 전혀 개입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뭔가 칭찬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점을 미리 보시고서 그들을 택하기로 결정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귀히 쓸 그릇이 될 자들이나 천히 쓸 그릇이 될 자들이나 동일한 "진흙 한 덩이" 에 속한 것이었다(참조. 롬 9:21).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구원에 관해서 해야 할 일이 있지도 않았다. 그들이 죄에 대해 속량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일을 벌써 여러 세기 전에 그들이 나지도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다 이행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생을 위해서도 그들이 기여한 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이 허물과 죄를 죽어 있던 처지에서 성령께서 그들을 살리셔서 새 생명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생한 영혼이 오로지 수동적인 입장에만 머무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 역시 큰 잘못이다.
이제 그가 스스로 충족한 상태에 있다거나,
이 새로운 본성이 그로하여 임무를 다하도록 힘을 준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포도나무의 살아 있는 가지가 되었으나, 여전히 그는 포도나무에게서 자양분을 받아야 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이런 포도 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로만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인 행동자이며, 그에게 은혜가 베풀어진 것은 그것을 선히 사용하기 위해 하기 위함이다. 은혜의 수단이 베풀어졌으니. 이제 그것을 사용할 책임이 그에게 있다. 아멘!
싸워야 할 싸움이 있고, 달려가야 할 경주가 그에게 있다. 극복해야 할 세상이 있고, 저항하여 할 마귀가 있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구원이 그에게 있다. 예, 과연 그렇다. 그 자신으로는 그런 임무를 이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생명을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그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고, 마지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견뎌야 한다. 영원한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앞의 단락에서 똑같이 이 점들 역시 참되고 확실한 사실들인 것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641
👣 로마서 9장 21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빌립보서 4장 11-13절.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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