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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34]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본문
[Gleanings in Joshua 234]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En Hakkore 2024. 8. 22. 21:174. 존귀한 맹세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수 9:20).
앞 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일부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한 사실을 보았다. 그들은 지극히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속이고, 자기들이 자기 민족을 위해 여호수아와 평화 조약을 맺을 권한을 지닌 사신들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 사기꾼들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준비한 것은 물론 멀리서부터 온 사람들인 것처럼 헤어진 의복가 썩은 양식 양식들까지도 철저히 준비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이 일에 관해 여호와께 뜻을 묻지 않고, 자기들이 감각에 의존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처신했다(수 9:14). 결정을 유보하고 기브온 주민들이 주장을 면밀히 조사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황급히 그들이 목숨을 살려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맺었다.
조건부로 약속하지도 않고, 그들을 맹세로 서로 간의 조약을 엄숙히 비준해 버렸다(수 9:15).
이 모든 일을 우리는 경솔한 처신을 피하라는 예리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38:16) 라는 교훈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처신인 것이다.
사흘 만에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나아온 가나안 땅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기브온 주민들의 성읍 들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수 9:16-1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기브온 주민들의 술수를 발견하게 된 것이 영적인 분별력을 발휘한 때문이 아니라(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성한 눈"이 그들에게 그대로 유지되었더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만(마 6:22)) 외부적인 수단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여호와께서 그들이 오랫동안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허용하셨지만, 비교적 부드러운 방식으로나마 족장들에 대한 그분의 불쾌하심을 그분의 섭리를 통해 드러내셨다. 이스라엘 회중이 그들에 대해 "원망"한 사실을(물론 그것이 정황상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채찍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로 하여금 잠잠히 있지 않고 불만의 목소리를 내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이나마 이스라엘의 화목이 방해를 받았고, 그들이 연합이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그러나 족장들이 한결같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결코, 사람과의 타협을 바라지 않았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는 것"(약 3:17)을 잘 깨닫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분명 기브온 주민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의 성읍들을 약탈하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족장들은 그 백성들이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든든히 서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고 말했다(수 9:19).
헨리(Henry)는 다음과 같이 아주 적절히 말씀한다.
"그들은 어찌 처신할지를 엘르아살에게 묻지도 않았고, 가나안 족속과는(이교도 들과는) 믿음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처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극히 거룩한 언약을 회피하고 심지어 거짓 맹세들을 신성시하기까지 하는 로마 교회의 현대적인 술책들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들이었다"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운 언약을 그대로 준수하기로 결정했다.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이 그들의 책무들을 그대로 준수하는 나라야말로 복스러운 나라이다. 이 족장들은 그야말로 실질적인 시련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의 신실한 처신으로 백성들이 잠잠해졌다. 그들은 양심을 거슬러 처신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족장들의 한결같은 일치된 태도를 사용하셔서 원망하는 회중을 잠잠하게 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는 다스림 받는 자들이 불만을 잠재우는 최선의 방법은 다스리는 자들이 보여주는 견고하고도 확고한 자세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이 족장들이 그렇게 처신한 것은 그저 편의상 그것이 좋기 때문이 아니었고,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리하여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맹세에 관해 근본적인 법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과 연결시켜야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그러므로 맹세는 여호와의 무서운 이름에 엄숙히 호소하는 것이요, 맹세하는 자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처절한 임재와 인식을 의식하게 하는 거룩하고도 능력 있는 행위이다.
상세히 말하자면 맹세에는 네 가지가 결부된다.
첫째, 진실성에 대한 공식적인 언명(言明) 이다. 하지만 맹세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언제나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 우리가 하는 진술을 확증하는 증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엄숙히 부름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시인한다.
셋째, 우리가 맹세하는 내용이 오로지 진실임을(롬 9:1) 하나님이 우리 양심의 증언해 주시기를 구하는 하나의 기원이다.
넷째, 저주인데, 이는 맹세하는 자가 혹 자신이 거짓을 말할 경우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보응하시고 벌하실 것을 구한다. 맹세는 이처럼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이요, 그에게 영광 돌리며 그분을 심판자로 불러들이는 하나의 예배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맹세를 어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극히 위중한 사안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으로 제 삼 계명을 어기는 것이요, 하나님은 결코, 이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신다.
레위기 19:12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은 그분을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무서운 사실을 고려할 때에, 맹세를 두려워해야 하며(전 9:2), 한번 행하면 깨뜨릴 수가 없고 거기에 메인다는 것이다(민 30:2).
입다의 경우에서 그 엄한 사례를 볼 수 있다(삿 11:30,31). 그러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맹세해서도 안 되고, 진정 중요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결코, 맹세해서는 안 되며, 맹세할 경우에는 지극히 진지한 마음과 자세로 임해야 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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