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John933》 본문
그리스도와 베드로(요 21:15-25)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21:16).
주님은 이제 "이 사람들보다"라는 비교를 생략하신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에 자기 자신을 제한시킨다. 이 물음은 주님께서 그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아직도 묻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은 실제에 있어 대단히 마음을 탐색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것을 하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많은 것을 주고, 아울러 많은 것을 경험하며,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의 결핍으로 인하여 여전히 죽은 자로서 마침내는 지옥 구덩이로 내려가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그것은 참으로 중대한 물음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기독교 정신에는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색칠한 밀랍 인형보다 나을 것이 없다. 다시 말하여 사랑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다"(라일 주교)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6).
이 구절의 "사랑"이라는 말은 한 단어로 번역되어지지만 헬라어로는 구분되는 두 가지 단어로 쓰여진다. 여기에서 그 의미를 좇는 것은 매우 교훈적이다.
한 단어는 다른 단어보다 상당히 강한 뜻을 지니고 있다. 차이를 나타내면 하나는 "사랑"으로 번역되어져야 하며, 다른 하나는 "애정" 혼은 "애착"으로 번역되어야 옳은 것이다.
주께서 21:15과 16절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떼 그는 더 강한 의미와 용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대답, 곧 그의 실제적인 말은 매번 "내가 주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줄 당신께서 아시나이다" 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사랑의 우월성을 공언하던 태도와 이렇듯 멀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가장 깊은 종류의 사랑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주님의 은혜로우신 답변을 받고 있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21:16).
이 말씀에서 "치라"는 말은 앞 절에서 주께서 사용하셨던 것보다 더욱 포괄적인 것이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규율과 훈련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님이 또 다시 "너희 양"이 아니라 "나의 양"이라고 부르셨음을 주목하라.
교황의 과도한 권리를 예기하는 동시에 반박하고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21:17).
이 말씀에서는 주님 스스로 좀 더 약한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시고 있다. 즉 "네가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묻고 계신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롬 5:21).
베드로는 세 번 그의 선생을 부인했다. 그렇다. 그리고 주님은 세 번 그의 사랑에 물음을 제기하셨다. 이는 "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베드로에게 물으심에 있어 주님은 이제 세 번 자신에게 고백하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은혜"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첫 번째 물음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여기, 세 번째 물음에서 주님은 이제 그의 애정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시하신다!
마음의 탐색이 이러한 정도로까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그것은바람직한 결과로 이끌어졌다. 주님은 오직 오직 치유하실 만하게 상처를 입히신다.
Arthur W. Pink 요한복음 p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