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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296] 본문
참된 신앙고백 2(마 7:21-27)
(우리는 네 가지의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관점에서 그들을 조사하고 검토해 보고자 하며, 그리고 그들 각자가 그 점에 있어 거듭난 자의 체험과 정당한 몫에 미치지 못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우리가 주로 고려하는 자는 고백자들의 세 번째 부류로서, 미혹된 자들이다. 우리는 네 가지의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관점에서 그들을 조사하고 검토해 보고자 하며, 그리고 그들 각자가 그 점에 있어 거듭난 자의 체험과 정당한 몫에 미치지 못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2. 회개
회개에는 네 가지 주요한 행위와 과제가 있다. 즉 죄의 고백, 죄를 미워함, 죄를 슬퍼함, 죄에 대항하려는 결의이다. 이들 각각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도 실행할 수 있으며 또한 그리하여 왔다.
가인은 자신의 죄의 무거운 압박감과 고통스러움으로 인해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 라고 외쳤다. 바로 왕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으며 그에 대해 스스로를 질책하였다(출 9:27). 사울 왕도 마찬가지였고(삼상 15:14), 유다 또한 그러했다(마 27:3).
죄를 미워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자면, 예후는 바알의 우상들을 몹시 싫어하여 모두 멸하였으되 그의 마음은 곧바르지 아니하였다(왕하 10:26-28, 31).
바벨론에서의 오랜 포로생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에 대한 그들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롬 2:22)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불의와 압제, 무자비와 잔인함, 거짓말과 부정직을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죄를 슬퍼함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면,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경배한 후에 슬퍼하였다(출 33:4). 그들은 하나님을 심히 노엽게 한 후에 크게 슬퍼하였다(민 14:39). 그리고 나서도 그들의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도발을 계속하였다(44절).
아합은 자신의 사악함에 대해 깊은 비탄을 나타낸 바 있다(왕상 21:27). 죄에 대항하려는 결의에 관해서는 그 강력한 예를 발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민 22:18, 38).
만일 거듭나지 않은 자가 이와 같이 회개의 방법에 있어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그들의 모자람은 어떠한 점에서인가? 만일 그들의 회개가 "생명을 얻는 회개"(행 11:18)가 아니라면 그것이 무슨 회개일까?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죄를 슬퍼함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형식주의자의 슬픔은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결점이 있다.
첫째로, 그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반역하였고 그의 율법을 범했으며 그의 거룩한 뜻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유쾌한 결과에 빠트려졌다는 이유로 슬퍼한다.
둘째로,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처지에 대해 슬퍼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불명예스럽게 되셨고 그의 권위가 완전함이 무시되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우선시하여 슬퍼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인해 슬퍼하였다 해도 그것은 그의 진노하심의 결과를 우려해서이다. 그들은 사탄이 만족해한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스스로의 인격과 재산에 대해 괴로워 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셨던 이유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셋째로, 그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이 영혼을 더럽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거룩한 소임을 잘 이행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자비를 박탈하고 불행에 처하게 하기 때문에 슬퍼진다.
그들이 죄를 미워함에 있어서도 결함이 있다. 그 미워함의 범죄가 모든 죄에 대해 미치지 않는다. 즉 그들은 "내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유죄로 선고하는 커다란 죄는 미워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죄에 대해서는 추파를 던진다.
그들은 공공연한 사악함은 미워할지 모르지만 은밀한 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도둑질과 부정함을 증오하긴 해도 자만과 독선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난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미워할지라도 만일 지구상의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간다면 기꺼이 그 같은 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은 손해를 받게 되는 죄는 미워할지라도 그들에게 소득을 가져오는 죄에 대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독특한 기질과 상반되는 죄를 미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체질에 맞는 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유다가 마리아에게 허비한다고 불평했듯이 그들 자신의 죄보다는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미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죄를 미워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죄를 미워하는 것은 본성의 타락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없다.
그들의 죄에 대항하려는 결의 역시 불완전하다. 우선 결의의 근원에 있어 그러하다. 그 결의가 새롭게 된 마음에서, 그리고 거룩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는 원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불유쾌한 결과 내지 미래의 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견제하시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죄에 대항하려는 온전한 결의에 있게 하는 것이기보다 죄를 짓고자 하는 생각을 제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결의는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이다. 발람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는 "나는 하지 않겠다"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 고 말하였다(민 22:18, 38).
이는 그가 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결의가 불완전함은 또한 지속성에 있어서도 보여진다.
그들의 훌륭한 결의는 완전한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쉽게 무너진다. 그들의 결의를 하게 된 이유가 지속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결과도 쉽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의가 비롯된 근본 이유가 없어시게 될 때 그 결의도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그 근본 이유란 단지 일시적인 분노나 일순간의 두려움 같은 것이며, 이러한 것이 사라질 때 그들의 결의는 실패로 끝난다. 그들의 인애는 한날 '아침 구름' 이나 '쉬 사라지는 이슬' 과 같을 뿐으로(호 6:4) 재빨리 사라져 버린다.
다윗은 기도할 때에 이러한 위험을 두려워하였다.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오며"(대상 29:18).
Arthur W. Pink 산상수훈 p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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