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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전기] 하나님의 주권

En Hakkore 2024. 5. 17. 15:33

아더 월킹턴 핑크(Arthur Walkington Pink 1886-1952)는 칼빈주의와 청교도 사상에 기초한 유명한 전도자요 성경학자이다. 1886년 4월 1일, 잉글랜드 노팅엄에서 독실한 크리스천 부모의 세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더 핑크가 태어났을 무렵, 산업혁명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듬해에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1837-1901 재위)은 즉위 50주년을 맞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은 사회, 경제, 과학, 기술이 크게 발전했으며, 기독교 신앙과 도덕이 문화를 지배했다(되돌아보면 너무나 편한 시대였다).

그 결과,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그릇된 풍조와 영향력이 이 시대에 많이 생겨나거나 강화되었다. 그중에 신학의 고등비평과 과학의 자연주의 및 다윈의 진화론이 있으며,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 같은 강력한 기독교 이단도 이 시대에 생겨났다.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 번성했으나 지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모의 훌륭한 인품과 신앙과 모범에도 불구하고, 핑크 집안의 세 자녀는 어린 시절에 신앙을 등졌다. 아더 핑크는 청년 시절의 신지학(theosophy)에 빠졌다.

신지학이란 "모든 종교는 '영단'(Spiritual Hierarchy)을 통해 인간이 보다 완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도우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각 종교는 어느 정도 진리를 내포한다고 주장하는" 컬트(cult, 밀교, 사이비 종교)이다.

그 시대의 유력한 반기독교 운동이었던 신지학을 영국에 처음 들어와 시작한 사람은 애니 베센트(Annie Besant, 1847-1922)였는데, 그녀도 아더처럼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에 대한 반감에서 신지학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아더는 이 컬트에서 집회 강사가 되었다. 그는 뜨오르는 별이었다. 흥미롭게도 아더가 신지학에서 끌린 부분은 신지학과 강신술(spiritism)의 관계였는데, 신지학의 핵심 신앙은 표면적으로 강신술, 곧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을 통해 검증되었다.

사실 신지학의 큰 매력은 강령회(seannecs), 비밀 지식, 미술 치료, 투시력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지학에 몰입했던 아더는 1908년 갑자기 신지학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 둘이었다.

아더가 기독교를 떠나 있을 때도, 부모의 기도와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아더가 신지학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아버지가 그에게 성경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아더는 이 구절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결국 방에서 사흘간 하나님과 씨름한 끝에 놀랍게 회심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자신이 인정했듯이 아더는 내적 갈등이나 공허감을 느껴 회심에 이른 게 아니었다. 그에게 회심은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사실 아더는 강신술의 체험이 속임수가 아니라 귀신들이 죽은 사람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평생 확신했다. 아더가 신지학을 공개적으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아더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연구했으며, 곧바로 목회의 소명을 느꼈다. 아더 핑크의 전기 작가 이안 머레이(Iain H. Murray)는 회심한 아더의 말씀연구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러한 영적 위기가 지나가고 2년간, 아더는 매일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제 아더가 침실에서 펴는 책은 성경이었다. 그는 매일 성경을 열 장씩 읽었으며, 특히 한 부분을 깊이 연구했다. 게다가 매일 한 절을 뽑아 묵상하고 종이에 적어 가지고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보면서 "그 구절의 영적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구절을 마음에 새겼다" 그는 이 방법을 사람들에게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일 이렇게 한 구절씩 써서 전차에서 외웠더니 에베소서 전체를 다 외웠습니다." 그는 일이 없는 날이면, 하루종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새로운 기쁨에 젖었다."

아더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며, 성경을 연구했다. 그러다가 대서양을 건너가 시카고 무디성경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후, 1910년 콜로라도 실버톤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2년간 목회를 했다.

그후 아더는 켈리포니아, 켄터키, 사우스케롤라이나 등 여러 교회 목회했으며, 순회 성경교사로도 사역했다. 그리고 1916년, 켄터키 출신의 베라 러셀(Vera E. RusseII)과 결혼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호주에서 두 교회를 목회하다가 1929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2년, 아더는 월간 잡지 <성경 연구>를 창간했다. 순전히 성경해석이 중심을 이루는 이 잡지는 전 세계 영어권 그리스도인들에게 배부되었다. 아더의 초기 저작들은 대부분 <성경 연구>를 통해 나왔으나 잡지는 1,000부 정도만 발행되었다.

아더의 저작을 통해, 독자들은 C. H. 스펄전(1834-1892) 이후 거의 듣지 못한 복음서 해석을 다시 듣게 되었다. 당시 그의 잡지는 발행인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더의 저작은 강해설교와 성경적 삶의 회복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34년, 아더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집필 사역에 전념했다. 자료를 보면, 아더는 살아 있을 때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인정받지도 못한 게 분명하다. 그는 혼자 성경을 연구하면서 현대 복음주의의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그 당시 교회는 청교도와 개혁주의 저서를 전반적으로 경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아더는 청교도와 대다수 원리를 지칠 줄 모르게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영국은 영적으로 점점 쇠퇴해갔다.

아더가 보기에, 이것은 상처도 못 내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치료도 못하는(거듭남을 통해) 어떤 '복음'(a gospel)의 확산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성경 전체에 능통했던 핑크는 성경의 주된 주제인 은혜, 칭의, 성화를 빼놓지 않고 다루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 진리를 지속적으로 조명했으며, 우리 세대는 이 부분에서 그에게 큰 빚을 졌다.

A. W. 핑크는 1952년 7월 15일 스코틀랜드 스토느웨이에서 빈혈로 숨을 거두었다.

아더가 죽은 후, 그의 저작은 '진리의 깃발'( Banner of Truth Trust)을 통해 재출판 되었고, 그 결과 훨씬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안 머레이가 말했듯이 "그가 죽은 후 그의 책이 널리 보급되어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 저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저작은 강해설교의 부활에 불씨가 되었고, 독자의 마음을 성경적인 삶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아더 핑크는 대부분의 인명사전에 빠져 있고, 많은 기독교 역사책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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