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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17]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17]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En Hakkore 2024. 4. 26. 11:45

제 7 장 금욕의 교리(개요 9)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은 게으름에 대한 허가증이 아니다. 도리어 그 은혜를 간구하며 그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1).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이 일에 있어 방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면제시켜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무가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 이 말씀은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어떤 변화가 생기기만 기다리는 것 그 이상은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 마음은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성령님을 위해 시기하는 마음으로 타락의 영을 대항해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길을 거절하여 마귀의 올무를 벗어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노력은 필요치 않은가? 사악한 자와의 교제를 피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노력은 필요없는가?

금욕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열심과 확고한 의지로 수행해야 할 임무이다. 거듭난 사람은 그 속에 영적인 본능이 있어서 거룩한 행위를 하도록 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한 자와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를 높여야 하며 그분의 고통을 보며 죄의 쓰라린 맛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요구를 말씀하신다. 즉 그분이 죄 때문에 죽어 주셨으니 우리도 죄에 대해 죽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죄에 대항하며(히 11:4), 그 죄를 고백하며(요일 1:9), 그 죄를 버려야 한다(잠 28:13). 성령님은 우리를 좌절의 길에서 건져 주시며 새로운 힘을 주셔서 계속 싸우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거룩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시며 울부짖게 하신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시 51:10).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랑하는이여. 기억하라 이 말씀속에는 성도의 의무와 성령님께 대한 존경,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 등이 잘 조화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성도는 이 일을 수행하는 주체이지만 타인의 힘을 빌어 그 일을 수행한다.

의무는 그들의 것이지만 영광과 승리는 성령님의 것이다. 성령임은 하나님이 우리에 명령하신 그것을 수행하시면서 우리 위에 도덕적 힘이 되어 주신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의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밝게 하셔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죄를 깨닫게 하신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양심을 매우 민감하게 해 주신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순결을 사모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행하게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거룩한 자극에 반응하며, 그의 도우심을 애원하며, 그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 응모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빚진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님과 연합하여 육체를 부인하며 거룩을 위해 힘쓴다면, 우리는 풍요로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의무에 따른 약속은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위협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 속에 죄에 대한 형벌이 함유되어 있는 것처럼 "살리니"리는 말은 영적인 축복의 은혜를 의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 그것을 부지런히 사용하면서 내재하는 죄에 끝없이 반대하고 도전한다면, 그때에는(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영원한 은혜와 안식의 삶, 영원한 영광과 축복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미 "영생"(요일 2:25)이 믿는 자의 현재 소유(요 3:36; 10:28)일뿐 아니라 앞으로 얻게 될 목표(막 10:30; 갈 6:8; 딛 1:2)이기도 하다는 말을 했었다. 성도는 지금 그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고 소망 중에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그의 새 본성 안에 영생의 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열매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약속은 어떤 일 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 위에 주어진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게 해 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일을 한 것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약속은 금욕 자체에 주어지지 않고 자기 육체를 죽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금욕을 수행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금욕했다는 증거이다. 육체를 죽이는 자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말은 영생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라는 진리와 일관되는 면이 있다.

그것을 수여하는 데 있어서 수상자의 장점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이는 영생을 얻는 모든 사람들의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소망의 근거를 없애버리는 말씀이다"(로버트 할데인).

그렇다면 약속의 조건이 원인이나 불확실성이 아니고 연합과 응집성에 있다는 말이다. 원인에서 결과가 나오는 것처럼 금욕에서 영광의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영광의 삶은 목적이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거룩한 대로(大路)만이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