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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89]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En Hakkore 2024. 4. 23. 10:55

제 5장 졸고 있는 성도들 2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1-13에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주제가 같은 현상에 대해 경고하셨다.  나는 이 구절의 신학적 문제를 다루며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다. 이 구절이 갖는 '예언적'인 암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여기서는 무가치하므로 성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점에 대해서만 논의하려고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처녀 비유를 난잡한 무리를 향해 하시지 않고 당신의 바로 그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여기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제림시에 놀라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그의 재림시에 주님을 환영하고 맞아들일 준비가 항상 되어 있도록 최대한 긴장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이 13절은 주님이 처녀비유를 말씀하신 근본 이유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깨어 있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무감각, 도덕적인 나태함을 경계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나는 성경 말씀을 절대로 제한하지 말라고 여러분께 간곡히 경고한다.

신앙의 유추(the analogy of faith)라는 관점에서 볼 때, 즉 성경의 일반적인 대의를 생각할 때 '인자가 올 그 때'를 이 시대 혹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 있을 주님의 궁극적인 재림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각각의 자른 의미를 살피고 각각의 차이를 구분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은혜로운 교제에 대해 성경은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신다"(시 72:6; 신 32:2 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 재판관의 입장에서 임하신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막 12:9). 물론 문자적으로 그분이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거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그리고는 그분의 사랑을 다시 새롭게 표현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또 '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제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 앞에 대속적으로 오셨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같이 버려주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라"(요 14:18). 이 말씀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종종 섭리의 수레 속에서 그의 백성들을 방문하신다.

어떤 때는 은혜스럽게, 그러나 또 어떤 때는 그 반대로 나타나신다. 마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6절 참조)는 말씀처럼 말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복음의 사역을 통해 중보적 입장으로 '오신다'. "또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6, 17; 눅 10:16 참조). 또한 주님을 그리워하고 주님과 교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나타나신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끝으로, 그분은 문자 그대로 가시적으로(행 1:11; 계 1:7) 나타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교제하기 위해, 재판관의 입장에서, 중보적으로, 가시적으로, 통치하시기 위해, 대속하시기 위해 그리고 영적으로 오신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되겠다.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만 나오면 모두 다 그것을 주님의 재림에 한정시켜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마찬가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을 기대하라"는 말씀으로 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리라.

앞에서 설명한 7가지 경우를 배제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그분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그때에,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해 오실 때 정중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복음의 사역자로 오실 때 민감하게 알아차려야 하고, 그분이 친밀한 교제를 원하여 오실 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성도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들을 이 땅에서 데려가실 그 때를 '바라며'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그는 죽어서 이 땅을 떠나게 될지, 아니면 영광스런 공중 혼인잔치에 휴거되어 이 땅을 떠나게 될지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이 두 가지 영우를 모두 대비해야 한다.

만일 죽어서 이 땅을 떠나게 된다 해도 그는 다시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게 될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부지런히 지키라"(잠 4:23).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유 21)는 말씀과 같다.

이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라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이 말씀은 우리가 끝없이 부지런히, 그리고 신중하게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