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실천 59]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59]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20. 10:53

6. 타락의 회복(4)

지금까지 내용들을 읽고 우리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믿지 않는다거나 그런 뜻의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그런 입장에서 설명해 왔다고 속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한다. 필자는 누구보다도 타락한 인간 본성의 번적 부패를 믿고 있으며 자연인의 곤경상태를 그 누구보다도 절망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비중생인의 상태란 그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도 없는 상태이며, 또 단 하나의 영적인 생각도 가질 수 없고 심지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진술로부터 우리가 악한 원리나 '육신', 즉 자연인에게 실재하며 그를 지배하는 어떤 것을 부인한다고 추론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성경의 증거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여 그것의 두려운 잠재력과 무서운 활동성을 분명히 빋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육신'의 구성요소를 정의하려 할 때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악한 원리이지 구체적이고 유형적인 실재가 아니다. 그것을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물질적인 차원에서 사고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어떤 비물질적인 것에 관한 정의를 형성하려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다른 사람에게 조리있게 표현하는 일도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타락시에 그의 존재의 세 부분(영혼.혼.몸을 말함 ...역자 주)중 어느 한 부분도 상실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렇다고 네번째 부분을 전달받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죄- 물질적인 실제가 아닌 -가 그의 내부로 들어왔다. 그래서 그의 전 존재를 부패시켰다.

그는 그의 모든 기능과 지체들을 오염시킨 역겨운 질병에 걸렸다. 따라서 그의 영과 혼과 그의 몸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 사람처럼 되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는 흔적뿐"(사 1:6).

언 도마토도 비록 먹을 수는 없긴 하지만 여전히 도마토이다. 그리고 속이 썩었을 때조차도 사과는 여전히 사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변질하여 영적으로 죽고, 전적으로 부패되었긴 해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의 성경만 잃었을 뿐 이전과 동일한 상태로 존재한다.

타락했을 때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죽음이란 우리가 이미 설명했듯이 소멸이 아니고 분리이다. 그런데 '분리'란 말은 '영적 죽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또 다른 용어인 '떠남'(alien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 역시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떠남'은 단절의 의미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반대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사랑하는 친구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면 내게 가장 고통스런 원수가 될 수도 있다. 타락한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거룩하신 분과의 교제를 단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적으로, 그리고 상습적으로 그분을 적대시한다.

단지 여기서 '단어들'만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일의 사실성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성경이 묘사하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또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엄숙히 선언한다(롬 8:7). '원수'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고를 취한다.

의사인 하나님은(the Divine Physician) 타락한 인간에 대해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는 무서운 진단을 내리셨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전히 해석을 필요로 하는 용어로 남아 있다. 우리가 이것을 해석할 때 성경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으면 그릇된 의미에 도달할 것이다.

자연인의 영적 상태는 무덤 속에 장사되어 있는 시체의 상태와 유사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어떤 견지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또 다른 견지에서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코에 악취를 풍기는 부패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시체가 인간을 향해 어떤 육체운동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영적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유추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이 양자 간에는 유사점 만큼이나 대조점도 있다. 시체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나 자연인은 있다! 시체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으나 죄인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물론(할 수도 없다!), 미음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영적 죽음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인 적개심의 상태이다.

그런데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조화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좀 드물다. 아주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 주의자(Arminians)들의 자유의지설(the free-willism을 열심히 부인하다가 인간의 도덕적 기능까지도 부인하며 버렸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타락한 인간의 무기력함을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인간을 문자 그대로 아무 책임 없는 기계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란 말씀의 이후 구절들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은 결과이다. 거기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에(즉, 영적 죽음의 상태 때)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무덤 속의 시체는 할 수 없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행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죄 가운데서 사는 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죽었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하여 죽어있는 한은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으로 충만하고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