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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57]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57]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20. 10:50

6. 타락의 회복(2)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다"(전 7:29). 같은 단어가 욥기 1:8과 시편 25:8에 나온다. "이것은 그가 처음부터 지켜야 할 한 가지 율법을 전제한다. 어떤 것이 규칙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할 때 먼저 그 규칙 자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 율법이 다른 것이 아니라 두번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준수될 영원불변한 의(義)의 법이라는 것을 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율법은 후에 십계명으로 요약될 바로 그 법이며, ...우리들이 도덕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을 지킬 때 사람이 의로와지는 바로 그 법이다."(Thomas Boston, Human inits Fourford State)

"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문자로 기록되거나 말로 표현된 외적인 ㅂㅂ을 주시지 않거 내적인 법을 그의 마음 속에 심으셨으며 그의 영혼의 틀 속에 심으셨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또 경외토록 하는, 그리고 신령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하는 그의 의지와 감정 속에 있는 신령한 기질과 성향 등이 그것이다."(굳윈)

창세기 2:17의 명령은 아담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담의 '정직'(uprightness)이 얼마나 변덕스러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아담이 완성되어 창조주의 손을 떠났을 때 ㅎ하나님의 법은 그의 마음 속에 심겨졌다.

그는 거룩한 본능과 성향을 부여받았다. 그 본능과 성향들은 그의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도록 돌보아주며, 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마치 그들의 새끼들을 돌보아주는 야수들과 또 새끼들을 위해 둥우리를 짓는 새들의 본성적인 '법'처럼 그의 영혼에 새겨진 본래적인 특성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타락 전의 아담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심으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어떤 성경구절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예스'이다. 그리스도는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선언했고, 로마서 5:14은 우리에게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떨어진 이삭을 보고 그 발에 어떤 곡식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타락한 인간성 안에 잔재하는 어떤 것들을 보고 타락 전의 인간 안에 있단 것들을 알 수 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롬 2:14). 그들의 양심은 그들에게 부도덕과 살인은 죄라고 가르친다.

아담이 본래적으로 소유했던 특성들이 그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희미하나마 남아 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신 그대로 계속되지 않았다. 그는 타락했고 공포가 그 결과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결과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에 사용된 표현들을 해석하도록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잘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 결과들로부터 밝혀내야 할 어떤 신비 같은 것은 없으며 그 일은 아주 단순한데, 그 결과는 한 마디로 '죽음'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해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면 그들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이다, 영적인 생명을 전제하는 것과 영적인 인격이 의미하는 바를 잘 관찰한 대답이다. 그러나 우리가 질문한 것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영적인 죽음'이 함의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말씀의 가르침에서 떠나 잘못되어 있고,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는 너의 영혼이 진정으로 죽으리라" 하시지 않고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신 사실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창 2:17). 죽는 것은 아담의 어떤 특성이나 일부가 아니라 바로 아담 자신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결단코, 결단코 의미 없이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함부로 변경한다면 우리는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죽음'은 소멸이나 폐기가 아니라 오히려 분리(seperation)이다. 육신의 죽음은 신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는 '먼 나라'에 있는 한 '죽은' 것이었다(눅 15:24).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5:6은 우리에게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말한다. 즉 죄를 행하며 죄 가운데서 사는 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은 "둘째 사망"으로 일컬어진다(계 21:8). 왜냐하면 그 못에 던져진 자들은 "그의 얼굴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살후 1:9)

Arthur W. Pink 영적이니 실천 p154